차분한 인상의 남성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시인 같진 않네'속말을 하면서 바로 이 얼마나 무식한 생각인가라며 고개를 젓는다. '시인입니다'라고 얼굴에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냔 말이다. 문태준 시인에 대한 나의 어설픈 첫 인상이었다.

 

 

그가 말문을 열고 3시간이 지난 후, '정말 난 무식쟁이야'를 또 한 번 깨달았다. 창피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 우선 난 시인은 허구를 창작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시적 느낌으로 전환시킨다 생각했다. 날것을 숙성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적는다고. 시인을 창작자로 생각지 못한 큰 실례이며 무례였다. 죄송합니다 시인님.

 

 

누군가에게 들은 문태준 시인은 책을 즐겨 읽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두 번째 무식한 생각이었다. 단순한 나는 '아, 책을 거의 안 읽는구나'였다. 그런데 어쩜 글을 그렇게 잘 만드는지 궁금했다. 강의 중 궁금증은 해결되었다. 주로 시집만 읽는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는 선택과 집중하여 온갖 종류의 시집만을 읽는 것이었다. 시를 지을 때 방해 받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또 한 번 시인님 죄송합니다.

 

 

그에 대한 나의 무지가 풀리자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창작자의 삶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간 내가 만났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삶을 대할 때의 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의 확보를 위한 부단한 노력, 일상생활에 파묻히지 않기 위한 자기 훈련,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통제 등 쉽게 상상치 못할 정도로 그는 하루하루를 시를 빚어내려 살아갈 것이다.

 

 

시인이 언급한 릴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오래 전 읽었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강의 중 이야기했던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창조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고독, 크고도 내적인 그 고독뿐입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몰입하여 아무와도 만나지 않는 것 ㅡ 그런 것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문태준 시인은 '가슴 가운데 고독한 방을 마련해라'고 이야기했다. 책을 들춰보니 줄친 흔적이 보인다. 불과 몇 년 만에 나는 그만 일상생활에 매몰되었다. 쓸쓸해진다.

   

 

내겐 40살을 맞이하던 해, 직장을 관두고 작가가 되길 결심하며 홀연히 사라진 친구가 있다. 당시 그보다 짧은 삶을 살았던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왜 회사를 다니며 글을 못 쓴다는 거지?' 한편으론 철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신문사 편집부에서 일을 하니 글 쓰는 일과 동떨어진 일은 아닐진대 말이다. 친구는 세상 누구와도 연락을 두절시킨 채 오롯이 그만의 공간에서 언어의 촉수를 움직이며 작업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1년 만에 세상 속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았을지. 고요하면서 단단해졌는지. 그를 만날 오늘 밤이 무척 기다려지는 비오는 오후, 내 맘은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