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138억년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며 46억년 지구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어마어마한 존재들입니다.
길가에 피어나는 이름모를 야생화와 어둠속에 기어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까지도 소중하게 여겨야할

이유입니다.
이렇게 생명이라 이름붙여진 모든 것은 자연의 점진적 변화에 적응해 살아남은 최적의 생존 형태를 표현합니다.


사무실 한 구석의 작은 화분조차도 그 좁은 토양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태양빛과 유사한
형광등 불빛의 광자를 받아 광합성을 하여 잎과 줄기를 키우고 꽃도 피워 씨앗도 만들어 냅니다.
생명의 선택은 그렇게 온갖 곳에, 아니 온 세상에 널려 있는 일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공진화'의 현장입니다.


지금 우리는 물속에 살던 선배, 대지로 올라온 선배, 나무를 타던 선배들의 형질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조금 변형해서 사용할 뿐입니다.
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줄 알았던 암석조차도 칼슘과 나트륨을 내놓고 인간의 생각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세상 모든 물질이 함께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되고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눈치채게 됩니다.


작은 화분속 초록의 잎도 미토콘드리아 호흡을 하는 동안 자유라디컬이 쌓여 산화되고
자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자연의 부름은 서서히 노화되고 잎이 바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자연의 노화 현상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인간이 자연에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의 선택 말입니다.

인간만이 이 자연의 순환 고리를 중간에 끊어 생존의 일탈권에 개입을 합니다.
어차피 가야할 숙명임에도 잠시 늦춰보고자하는 인간의 오만입니다.
바로 선택에 인간의 의지를 끼워넣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에 의해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 선택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결말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 중간과정은 본인이 끝없이 선택하는 과정임을 알고 선택을 통해 벗어나고자 했던 그 무엇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본질을 떠나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낸 인간이 결코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이 바로 오만(hubris)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공진화'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무실 바닥에 깔린 화강암판에서 장석과 운모와 석영을 찾아내야하고 빌딩 기둥에 덧입혀진 시멘트에서
조개껍질의 무늬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연질의 지느러미를 수없이 단련하여 근육을 만들었던 틱타알릭(Tiktaalik)과 그 근육을 이용해 대지를
어기적거렸던 아칸토스테가(Acantostega) 선배의 강인한 형질이 아직 내 뼈와 근육을 지배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과학이라는 디테일이 촘촘이 엮어내는 진화의 그물은 이제 모든 생명을 아울러 건져올리고 있습니다.
과학은 실재가 없다고 생각한 현상을 물리적 실체로 보여주고 증명해내는 디테일입니다.
과학은 한치도 벗어날 수 없고 꼼짝할 수 없는 수갑입니다.
아니 과학이 생명과 실체와 존재와 우주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다시 3억5천만년전 물속을 헤엄치던 선배를 되돌아 봅니다.
대지로 올라와 산소 호흡을 시작한 선배를 떠올려 봅니다.
더 멀리 36억년전 태양에너지로 물을 분해해 산소를 만든 시아노박테리아 선배까지 거슬러 올라가봅니다.
내 뼈와 근육과 허파와 브레인에까지 살아있는 그들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봅니다.
지금 내 모습이 그들의 장점을 모자이크해서 붙여놓은 화신임을 보게 됩니다.
46억년 생명의 대장정이 펼쳐진 지구표층의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고
그 자연에서 생존하는 생명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음이 어찌 눈물겹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의 경이를 알게해준 모든 생명에 감사할 뿐입니다.


따뜻한 봄볕이 참 반가운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