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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할 때 소재로 삼지 말아야 할 사안이 두 개 있다. 바로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이 두 가지 소재를 가지고 깊이 있는 사견들을 주고받다가는 마음 상하기 일쑤다. 물론 같은 정치 성향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끼리의 대화는 분위기를 더욱 좋게 만들 수 도 있긴 하지만 그런 상황은 참 드물다. 왜 그럴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념으로 상대를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종하는 정치, 내가 믿는 종교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렇게 추종하고 믿는 확신이 신념이고 이 신념이 자기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대방의 인과관계다. 내 의도와 관계없이 상대의 심리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데로 타인의 세계를 바꾸려는 시도인데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상대방의 심리이기에 충돌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정치와 종교, 두 사안은 무한대의 확률로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세계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 내가 믿고 내가 따르면 그것이 정답이다. 여기에도 기본 룰이 있긴 하다. 반드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나하고 다르면 틀린 것이 되고 적이 되고 없어지고 눌러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 치졸한 감정은 어디서 발원하는 것일까?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감정의 오류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부터 난다. 화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 내 길을 방해받을 때 바로 표출된다. 운전을 하면 금방 드러난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도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서면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어쭈구리! 내 앞에 끼어들어? 깜빡이도 늦게 켜고 내 차선으로 들어와. 박으라는 거야 뭐야?" "아! 앞 차 아저씨!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가려면 빨리 가던가?  왜 내 앞에서 우물쭈물 얼쩡거리면서 천천히 가는 거야? 휴대폰 보면서 운전하고 있지? 제한속도도 몰라?" 뭐 이 정도는 기본이다.


왜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감정과 자아를 들여다볼 일이다. 이 감정과 자아는 아무 때나 드러나지 않는다. 해당 상황에 노출되어야만 발현된다. 운전을 하지 않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상황과 같다. 바로 자아는 불확실성을 줄이려고 출현한 것이기에 그렇다. 운전할 때 내 시야가 훤히 보여야 하는데 앞에서 다른 차가 알짱거리면 불안해진다. 내 시야 전방이 앞차로 인하여 보였다 안보였다 하면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바로 신경질과 화로 표출된다.


하지만 불안은 느낌의 세계다.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무엇 때문인지 대상이 없다. 공포와는 다르다. 공포는 동물도 느끼지만 불안은 인간만이 느낀다. 공포는 대상이 있다. 하지만 대상이 눈에서 멀어지거나 회피해버리면 공포는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라는 것이다. 막연한 불안이다. 왜 불안한가? 언제 올지 모르고 언제 끝날지 모르고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를 아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불안은 확률적일 수밖에 없는 뇌와 결정적으로 한순간에 한 가지 만을 할 수밖에 없는 행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로 인하여 생겨난다. 행동의 원천은 충동이다. 불안을 줄이고 충동을 억제하는 과정이 인류 문화와 문명의 역사다. 충동을 억제하여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다. 인류는 정교한 습관적 절차에 의해 충동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의례(ritual)다. 규범이고 경전이고 종교다.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습관 반응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안에 있는 신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정교한 습관 반응으로 충동을 억제하고 불안을 줄이는 방편으로는 최고의 도구인데 쉽게 곁을 떠날 수 없다. 뉴버그와 다킬리는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책을 통해, 신의 유무와 관계없이 인간의 뇌는 숭고하고 절대적인 느낌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설파한다.


인간은 바로 감각과 느낌과 인지의 세계를 언어를 통해 폭발적으로 의식의 세계로 한 차원 높였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시간의 구속을 끌어들였다. 시간은 언어로 인하여 등장한 인간의 창작품이다. 시간은 원인과 결과, 앞과 뒤가 있는 순서다. 언어가 바로 철저히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순서다. 언어의 순서를 바꾸어놓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동물의 세계는 자연과 결합되어 살아갈 뿐 시간을 따지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적 관점으로 시간이 흐를 것이다라고 상정해 놓고 보기에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시간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연을 벗어났다. 심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메타버스 가상세계가 그렇고 AI가 그렇다. 아니 이미 언어를 통해 종교라는 가상세계(?)를 만들어 인류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인간의 의식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의식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언어로 논리로 만들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여 과학을 한다. 신이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언어로 자연의 시간을 규정했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닌지? 시간도 흐르지 않고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의 상정. 신의 등장은 그렇게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추앙할 수밖에 없는 필연의 존재, 절대의 시간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