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차 해외학습탐사 몽골일지(2일째)

 

2016820, 토요일. 날씨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밤에 구름이 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일찍 일어나지 못한 걸 보니 너무 피곤했나보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침낭을 챙겼다. 식사 전까지 어제 못다 쓴 일지를 쓰려고 메모공책과 볼펜, 은박지깔개를 챙겼다. 텐트를 들치고 나오니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다. 풀밭을 걸으니 이슬이 내려 샌들도 젖고 양말도 젖는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에 앉아 일지를 써내려갔다.

7시 반에 아침을 들었다. 누룽지 삶은 것에 반찬으로는 건과를 넣은 멸치조림, 양파 넣은 오이피클, 무말랭이무침 등 세 가지와 김치가 놓였다. 밥 먹을 시간, 서쪽에는 하얀 달이 동그랗게 떠있고 동쪽에는 붉은 해가 둥글게 떠오르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공기가 맑고 구름 없는 하늘이어서 너무나도 선명해 대원들이 감탄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식사 뒤, 텐트를 걷고 침낭과 캐리어를 겨우 챙겨 공용 주머니에 넣자마자 5분 후에 박사님 강의가 있다고 알린다.


830분부터 박사님 강의가 있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목제국의 순서부터 외우자.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그르, 키르키즈(뒤에 키르키즈스탄이 됨), 거란(, 서요), 몽골(차카타이한국, 일한국), 여진(1127 송나라를 멸망시킴, 후금청나라와 연결 됨. 신장 위그르, 내몽골 )의 순이다. 몽골은 셀렝게(Selenga), (Tuul), 오르콘(Orkhon)강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중국은 당시 유목민족을 중심으로 된 하북과 강남으로 갈리고 강남은 오나라 때 개발되어 남송 때 문화가 발달되었다.


외워야 할 주요연대로 926년 발해멸망, 936년 요나라가 연운십육주 획득, 1126년 요나라 멸망이다.

중국 만주(滿洲)는 만주시리, 만수실리 등으로 불리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온 지명이어서 불교와 관계가 있다.

여진은 만주 동부에 살던 민족으로 최북방의 야인여진(생여진), 흑룡강성의 해서여진(숙여진), 길림성의 건주여진으로 분류되며 건주여진은 우리나라 함경도지역과 가까워 교류가 있었다. 누루하치는 건주여진에 후금을 세웠다. 누루하지의 아들 홍타이지는 나중에 청나라 2대 황제가 되어 후금을 잇게 되었다.


유목민족이 지구상에 언제 생겼냐하면 BC 1000년 전부터이다. 카스피 해에서 동쪽으로 7000Km에 달하는 곳까지 살았다. 농경은 1 만 년 전부터였으나 가뭄과 천재지변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목축으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최초의 유목민족은 스키타이 민족이며 중국에서는 샤카로 부르다가 나중에 색이라 불렀다.

기마는 BC 3500300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처음엔 안장이 없어 말 엉덩이에 올라탔다. BC 2000년에 수레가 생기고 소에서 말로 바뀌면서 속도가 붙었다. 처음에 이륜마차는 수레바퀴에 틈이 없이 둥근 테 모양이어서 무거워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수레바퀴에 바퀴살이 생기면서 바퀴가 가벼워져 속도를 점점 내게 되었다.


BC 4세기에 스키타이유적이 발견되었다. BC 3세기 흉노족의 나라 오르도스(Ordos-궁전이라는 뜻)를 진시황이 탈환하였으나 이내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섰다. 흉노의 묵특선우는 한나라와 싸워 이겨 화친을 맺어 100여년 지속하였다. 또한 묵특은 월지도 몰아내었다. 월지는 나중에 빅토리아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미란다왕문경이라는 문답형식의 경전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된 나라이다. 유목민족은 나중에 동호(東胡)로 불리는 오환과 선비로 갈라지게 된다.


다음은 유로선생의 옛 몽골지도 설명이다. 운누는 BC 20993년까지 있던 나라다. 운누가 있을 때 선비도 있었으나 작았다. 운누의 드믕한은 묵특선우를 죽이고 한이 되었다. 선비는 2세기부터 4세기까지 있었고 오르콘 강 주변에는 위그르(745840), 탁발선비, 유연(돌궐족, 330555) 등이 있었다. 트루크(552745)는 빌케 카칸 비문과 퀼 테킨 비문을 남겼고, 비문은 터키 정부가 몽골에 세운 호쇼 차이담(Khosho Tsaidam) 박물관에 모셔져있다. 옛날의 몽골글자는 칼릭 또는 갈릭문자라 부르는 위그르 문자를 썼으나 지금은 러시아 문자로 표기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위그르는 1940년까지 4개의 큰 도시가 있었고 카라코룸에 위그르 토성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흉노는 적석곽(積石廓)이라는 무덤을 만들었고 거란(9161125)은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었다. 적석곽은 우리나라 신라에 영향을 끼쳐 경주 노동동 고분군에도 있다. 거란은 남명관과 북명관을 두어 통치했고 북명관은 유목민족을, 남명관은 농경을 주로 하는 정주민족을 다스렸다.


강의는 9시경에 끝나고 이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는 구릉과 초원이 끝없이 이어지고 양, 염소, , 소 등과 게르만이 보일 뿐이다. 어디에 눈을 두어도 보이는 것은 푸른색뿐이다. 말 목장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말을 몰고 달리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 기마민족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1시경 사방이 확 트인 초원에 내렸다. 허브가 쫙 깔려 있는 곳이어서 차바퀴에 깔려 마지막 향을 내뿜는다. 점심준비를 하는 동안 초원을 잠시 걸었다. 허브향이 날아와 심신의 피로를 가시게 한다. 1시 반에 점심을 들었다. 매트를 깐 천막에서 마주보고 앉아 먹었다. 빵과 시리얼, 우유와 오렌지주스, 잼이 준비되어 식성대로 가져와 사과 4분의 1쪽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했다.


점심 뒤에 박사님 강의가 있었다. 천막 아래 앉아 들었다. 몽골책자에서 중요한 것을 체크해주고 외우라는 당부가 있었다.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책을 넘겼다. 몽골을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하고 특히 티베트 불교를 알아야만 몽골역사가 이해된다고 하며 밀교에 대해 공부하라고 했다.


2시반경 출발해 한 시간을 달려 넓은 초원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사방이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갈단과 자나바자르와의 싸움터였던 장소다. 갈단은 강희제와도 관련이 있고 테를지 전투로 유명하다.


우리 탐사 일행을 보고 어디서 달려왔는지 낙타를 탄 어린 소년 세 명이 놀러왔다. 대원들이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서로 번갈아 사진도 찍고 낙타 위에 올라타 보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탐사일행 중 젊은 학생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대며 낙타와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그때 그 순간을 맛보러 박사님과 함께 가까운 구릉으로 올라가 역사의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4시 경, 차가 움직이자 낙타가 잉잉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그들도 이별이 슬픈가보다.


정확하게 550분에 Xapxopym(몽골글자로 하르호름)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먼저 들어가는 입구에 그림을 보고 박사님이 설명했다.

신생대 플레이스토스에 살았던 맘모스는 1만여년 전까지 살았던 동물이다. 당시는 맘모스 가죽으로 지붕을 얹고 옷을 만들던 때라 가죽을 벗길 도구가 필요했다. 돌로는 흑요석이 제일 단단해 칼이나 도끼를 만들어 썼다. 사슴돌이라 불리는 암각화는 사슴그림이 그려진 돌을 말한다. 유목민의 유적으로 몽골의 곳곳에 남아 있다. 돌로 만든 흉노족의 형상, 칭기즈칸의 변발, 마패 등의 그림이 있다. 마패는 역참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신분증 비슷한 것이다. 쿠빌라이 칸 시대에는 역참이 1400 여개나 있었고 겨울에는 땔감으로 석탄을 공급해주어 추위를 피하도록 했다. 그 외에 수참(), 구참(썰매 끄는 개) 등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호구조사도 실시했다. 인장(印章)은 대칸이나 천자로부터 받은 인장이 제일 효력을 가졌다. 은세공은 바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은 세공사를 몽골로 데려와 만들게 하여 은세공이 발달했다.


다음은 비디오 상영실에 가서 영어로 설명하는 비디오를 감상했다. 10분 동안이었다.

전시실에는 지배자가 죽으면 무덤에 넣는 목각말, 목각용(), 토용이 전시되어 있다. 그전에는 몽골이 순장을 했으나 티베트불교가 들어오면서 순장을 금하게 되었다. 대신 토용이나 목각용으로 대체하였다. 말 탄 토용, 장군 토용, 상상의 동물토용 등도 있다.

말 도구의 하나인 등자가 전시되어 있다. 등자가 나오면서 다리에 힘을 줄 수 있어 유목민족의 무력이 증강되었다.

금제품의 그릇과 장신구가 전시 되어 있다. 흉노족의 무덤에서 그리스 장신구가 나오는 것을 보아 그리스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한 무제가 하서사군을 설치했을 때 흉노족을 잡으니 금으로 만든 조각상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 불상을 말한 게 아닌가싶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윗대 조상이 흉노의 휴도왕 이라는기록이 있다.


신라는 이런 영향으로 칸이라는 칭호를 쓴 왕이 있었다. 마립간이라는 칭호다. 마립간이란 칭호를 쓴 왕의 무덤에서 금 장신구와 말과 관련 있는 물건 들이 나왔다. 흉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카라코룸의 옛 모습을 복원한 모형도를 보니 규모가 엄청 큰 것에 놀랐다. 얼마나 번성했는지 모형도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쿠빌라이(12151294)의 직책은 막남한의 대총독이었다. 쿠빌라이는 뭉케 칸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쿠릴타이 회를 주제해서 칭기즈칸 왕가의 지지를 얻어 칸이 되었다. 한편 뭉케 쪽에서 막내아들 아릭부케를 잠정적인 칸으로 지정했으나 쿠빌라이가 카라코룸을 정벌해 초토화시켜버렸다. 당시 고려사신이 쿠빌라이를 만나러 카라코룸까지 왔으나 만나지 못했다. 돌아가던 도중에 만나 그 인연으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카라코룸 성내에는 무사, 병사, 장군 등은 살지 못하게 했다. 한 곳에 머물면 무력을 상실할까 두려워 항상 떠돌게 하였다. 병력을 가장 중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칸이라는 칭호는 유연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흉노는 선우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티베트 종교의 각 분파는 카큐파, 겔룩파, 닝마, 샤카파 등 네 분파로 나뉘며, 다시 카큐파는 카르마 카큐파, 팍모두 카큐파, 챌파 카큐파로 나뉜다. 달라이라마의 달라이는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영적인 스승이란 뜻으로 몽골어이다. 달라이라마는 겔룩파의 종주를 말하며 티베트의 국왕이기도 하였다.


1636년에 몽골이 청나라에 넘어가자 청은 출가를 많이 장려해 카라코룸에만 해도 천 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 몽골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 이후 구소련에 의해 몽골에 있던 사원 칠백 여 개가 쑥대밭이 되었고 겨우 칠십 여 명의 승려가 잔존했다고 한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체재하의 일이다.

기원전 1000여년부터 유라시아 전체는 철기시대였다. 히타이트 철기문화의 영향이다. 우리나라는 청동기문화가 살짝 지나가고 철기문화를 맞이했다.

발석은 돌을 줄처럼 새워 놓은 것으로 유목민들이 전쟁에서 적을 살해한 숫자를 표시한 것이다.


중국에서 쫓겨 난 몽골은 원조를 지지하는 서 몽골과 오이라트 연맹의 동 몽골로 갈라졌다. 다시 서 몽골은 동서로, 동 몽골은 남북으로 갈라져 고비사막 이남은 내몽골, 한가이산맥을 중심으로 막북은 할하몽골 즉 외몽골이 되었다.

하서사랑은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 지역의 탈라스 전투에서 고구려출신 고선지가 압바스(Abbas. 7501258) 왕조와의 싸움에 진 이후로 더 이상 넘어가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중앙아시아가 점차 이슬람 화가 되었고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들은 종이제지기술을 전했다.


오르도스(Ordos)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노른자위 땅이어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오르도는 고대터키어로 몽골어로는 본영, 숙영, 궁전을 뜻하나, 후에 이동하는 왕궁이란 뜻으로도 쓰였다. 오르도를 몇 개나 소유한 왕도 있었고, 고려왕도 오르도를 가졌다. 박물관에 오르도가 행차하는 모형이 놓여있다. 궁전은 이동식 게르 모양이고, 앞뒤로 말을 탄 신하들을 비롯해 걸어가는 이들도 있다. 돼지, 염소, , , 소 등 가축들은 제일 뒤를 이어 따라갔다. 이동하는 동안의 양식꺼리인 셈이다.

위그르(744840)는 중앙아시아에 살던 트루크계로 키르키즈에게 붕괴된 뒤 일부는 도망가 카라한왕조(840927)를 만들었다.


우구데이 칸(11861241)은 칭기즈칸(11621227)이 죽은 뒤 1229년에 칸에 올랐다. 그는 카라코룸에 도성을 세우고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했다.

탑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자나바자르는 소욤보라는 문자를 창제하고 태극문양 외에 여러 문양을 만들어 내어 썼다. 우리나라는 경주 감은사지에 그려져 있는 태극문양이 최초이다.

박물관 입구에 흙을 파서 밑바닥을 넓게 한 곳에 도자기 가마 모형이 놓여있다. 두꺼운 유리로 덮어 들여다볼 수 있게 해두었다. 녹유전, 벽돌 등, 사원을 지을 때 필요한 것을 구워내던 가마이다. 융성하던 당시의 카라코룸은 사원의 기와를 황금으로 입힐 정도로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박물관의 유물들을 보며 설명하는 박사님의 열렬강의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오후 7시에 박물관을 출발했다. 15분쯤 달려 SUPER MARKET이라는 영어 간판이 달린 곳에 섰다. 일반마트와 별반 다름이 없는 곳으로 물과 필요한 식품들을 사가지고 이내 출발했다.


저녁 820분경에 숙영지에 도착했다. 오르콘강 상류에 있는 위그르의 옛 수도이자 유적지가 있는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에서 가까운 곳이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텐트를 치고 풀밭에 앉아 있노라니 어디서 왔는지 양과 염소 떼들이 몰려와 풀을 뜯는다. 대충 봐도 수 백 마리는 넘는 듯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초원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다니는 양떼들. 점점 어두위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다. 젊은 학생들은 아마 처음으로 이런 광경을 보리라. 신기한 듯 옆에 가서 사진도 찍고 만져보기도 한다. 음메에에라는 소리만 가끔 들리는 속에 노을은 짙어만 간다.


몽골의 저녁노을은 어디에다 비교할까. 황금빛과 붉은 빛이 적당히 어우러진 신비한 빛깔이다. 게다가 흰 구름과 먹구름이 살짝 양념을 뿌려 환상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그 사이로 말들이 백 여 마리 떼를 지어 지나가는 게 멀리 보인다. 저녁이 되니 잠자리를 찾아가는 중인지 모른다. 그야말로 노을을 배경으로 한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러나 더 어두워지면 그 장면들이 다 사라지리라.

저녁 9시를 넘긴 시각에 식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그나마 빠른 편이다. 햇반과 라면, 김치와 반찬 세 가지였다.


10시경 흰 반사막을 버스에 걸고 컴퓨터를 통해 설명하는 박사님의 강의가 있었다. 저녁이 되니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추워지자 대원들은 두꺼운 옷으로 감싸거나 침낭까지 두르고 나온 이도 있다. 탐사용 책은 사진이 흑백이어서 칼라화면으로 보며 더 상세하게 몽골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우리들이 단편적으로 알던 역사적 상식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여태껏 모르고 그냥 살아온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우리나라 역사만 배울 게 아니고 가까운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유라시아 유럽 러시아 미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폭 넓게 배웠어야 했다. 새로운 역사관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부지런히 입력시켰다. 박자세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알지 못한 채로 바보같이 살았을 것 같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나니 정말로 지구촌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강의를 들었다. 밤이 되니 구름이 끼어 밤하늘의 별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사방이 깜깜해졌다. 헤드 렌턴이나 손전등이 없으면 꼼짝할 수 없는 몽골의 초원이다. 잠을 자러 텐트로 들어가 자리에 눕자, 한의사인 지승재 대원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픈 분은 없나요, 있으시면 말씀하세요.“라며 텐트마다 외치고 다닌다. 탐사일정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다녔다. 저렇게 봉사하는 대원들 덕택에 박자세 대원들의 마음이 더욱 푸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