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떨리는 가슴을 안고 떠났던 만주 백두산 17 박자세 해외학습 탐사.

 

기원전 7000 요하문명으로 부터 민족의 영산 백두산까지 3000Km 대장정을 무사히 마치고 57명의 박자세 학습탐사 대원들과 나누었던 감동의 순간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문호 탐사대장과 함께 했던 지난 8일간의 학습탐사를 통해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있었던 소중한 시간 이였다. 북방민족과 중원 역사의 주인공들과 더불어 한반도의 역사를 두발로 경험한 이번 탐사는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있는 깊은 순간들 이였다.

 

4/29 학습탐사 Day 1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새벽 5시반 집합장소에 모여 탐사책자를 받았다. 인천공항은 붐비고 이었지만 탐사대원들은 밤을 새고 달려와 08 55 출발하는 심양행 대한항공 831편에 탑승하였다. 심양에 도착하여 제일먼저 방문한 곳은 요녕성 박물관이다. 새롭게 오픈 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중국의 박물관 전시에 깜짝 놀랐다. 박물관 전시가 예전보다 세련되어 것을 느낄 있었다.

 

박사님과 함께 중국고대비문부터 심양에서의 첫번째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실크로드. 초원의 길과 로드까지 다양한 테마관이 준비되어 있다. 탐사책자에서 보았던 옥에 관한 전시물도 눈에 들어온다. 수신기를 통해 설명을 들으니 박물관탐사도 귀에 쏙쏙. 즐겁다.

 

점심을 먹고 청나라 역사가 시작된 심양 고궁을 방문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만주족 누루하치에서 홍타이지까지 청나라의 시조가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머물었던 곳이다. 황제가 연회를 벌였던 대정전에서 역사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만주 팔기군의 펄럭이는 깃발을 그려본다.

대정전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중앙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듯 마리 황금용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듯 기둥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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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학습탐사 Day 2

새벽6 호텔2층에서 박자세 학습탐사단의 새벽공부로 시작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모두가 열심히

박사님의 강의에 경청한다. 이번 학습탐사의 프레임은 아주 효과적이다. 암기도 쏙쏙!


식사 이동한 곳은 조양시 북탑박물관이다. 전연.북연.북연의 불교문화를 있었다.

북탑에서 발굴 유물과 더불어 여러 불상과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도읍에서 궁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탑이 쌓아져 있었다고 한다.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사리도 보물로 지정되어 전시되어 있다.

예외없이 옥귀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탐사중에 가장 많이 유물중의 하나이다.

요녕성 조양시에 위치한 북탑은 특별히 내부도 관람할 있었다. 요나라때 세워진 38.7미터 높이의 북탑내부에서 발견된 불교문헌들은 당시를 이해할 있는 소중한 유물들이라고 한다.

 

점심식사 후에 우하량유적지도 이동 중에는 이동 중에는 프레임 1 한반도 주요연표를 외워 발표하는 탐사대원들이 많았다. 홍산문화를 만나는 우하량박물관에는 삼황오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시작으로 출발 보았던 다큐멘타리 속에서 보았던 돼지머리모양을 옥귀와 우하량에서 발견된 여신상을 볼수 있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만큼 친근해진 유물들 앞에서 생각이다.

 

홍산문화 유적지의 선사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돌도끼부터 돌망치까지 이제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홍산문화의 옥기들은 박물관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세계 4 문명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 하였는데 홍산문화 유물의 발견으로 이들 보다 휠씬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적석총으로 쌓아올린 제단과 시대 주거지를 보면서인류의 초기 삶의 형태를 추정해 본다. 시대 이미 이토록 아름다운 옥기를 주조할 있는 기술과안목이 놀라울 뿐이다.


여신상이 발견된 유적지는 이미 최신식 건물이 지어져 발견당시의 장소만 표식과 더불어 보여줄 이였다. 이들은 발굴 산화되어 색이 변하는 유물들을 보존하고자 다시흙으로 덮어 보존하고 있었다. 우하량 2지점 유적지는 실내체육관을 방불케 하는 돔형태 건물속에 보존하고 있다. 중국 청화대에서 설계하여 설치한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중국정부의 의도가 엿보이는 곳이다. 이들의 움직임에 대한민국 유적지 발굴과 보존이 어떤지 스쳐 지나갔다. 우하량 2 지점은 중앙에 제단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제단의 형태는 중앙에 사각형의 제단과 주의에 둥근 적석총이 보이고 박물관에서 옥귀를 포함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홍산문화시대에는 권력이 분리되고 신분이 나뉜 사회라는 것을 있었다.

 

다음은 요중경의 중경탑으로 이동하였다. 마침 내몽고의 현지인들이 축제로 길을 막아 시장을 가로질러 중경탑을 가로 질려 갔다. 간판도 몽골어와 중국어가 이중으로 쓰여져 있었다. 중경탑 뒤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루에 400 북탑과 1000년된 중경탑 그리고 우하량의 여신상까지 천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대장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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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학습탐사 Day 3

새벽공부는 계속된다5 모닝콜6 아침학습 - 7 조식 8 출발!

홍산공원에 노동절 연휴로 인해 현지인들이 북적된다. 탐사단 일행도 붉은산이 보이는 곳에서 박사님의 현장강의를 듣는다. 외로운 늑대처럼 붉은 산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어느 곳에 있어도 나의 공간에 나만의 시간은 존재하는 법이다.

 

오한기 박물관은 박자세 학습탐사단을 위해 특별히 박물관을 오픈해 주었다. 이곳은 요녕성박물관과는 다르게 오래된 건물이였으나 나름 홍산문화를 눈에 보여주는 모형물을 시작으로 탐사단을 감동시킨 공간이다. 요하문명의 시작 기원전 7000년경 소하서문화로부터 당시 주거지모형도 있었다. 어김없이 옥귀도 보았다.

 

흥륭와유적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도 옥귀와 더불어 전시 되어 있다. 세발달린 토기도 전시되어 있다. 채도가 있는 도기도 보인다. 프레임 3번을 암기해서 인지 박물관 탐사가 너무 신난다. 눈과 귀가 호강하는 날이다. 다시 한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하루이다. 비파형동검도 보았다. 용문양의 유물도 보인다.

 

흥륭와 문화는 기원전 6000년경에서 5000년경까지 용의 문양이 지배자의 상징으로 보이는 시기이다. 조보구 문화는 기원전 5000년경에서 4500년경까지 봉황문양이 지내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시기이다, 기원전 4500년경에서 기원전 3000년경까지의 홍산문화 현장에서 심장 뛰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전기는 3500년경까지 신석기 시대로, 후기는 동석병용의 시기로 초기 국가단계로 초급문명 사회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2900년경에서 기원전 2400년경까지의 동석병용의 소하연문화와 고구려 문화로 연결된 청동기 시대의 하가점 하층문화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는 고급문명사회가 출현하는 시기이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기원전 1500년경에서 기원전 800년경까지 이어지게 된다. 역사의 숨결을 굽이쳐 보이는 오늘 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흥륭와 유적지로 가는 길은 내몽골의 전형적인 가로수 길이 탐사단을 환영하는 나란히 줄이어 있었다. 탐사단의 1호차. 2호차는 흥륭와 유적지라고 쓰인 허허벌판에 멈추어 섰다.

허허벌판에서 기원전 600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바람은 탐사단의 가슴 속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여 새로운 주거지를 이루고 살았을 고대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역사는 흐른다.

석양이 아름다운 내몽골의 흥륭와 유적지를 뒤로하고 일행은 숙소로 이동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저녁공부를 시작한다. 벌써 프레임5번이다. 북쪽의 요나라와 중원의 510국에서 청나라까지의 역사도표이다. 우리가 지나온 역사의 현장은 이제 프레임이 되어 머리에 쏙쏙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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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학습탐사 Day 4

탐사 4일째 번째 방문지는 사해유적박물관이다. 신석기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철수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용문양 돌무덤은 다큐멘터리에서 보아서 인지 금새 눈에 들어 왔다. 기원전 5600년경에 출현한 사해문화의 유적지에 것이다. 역시 돌무덤은 흙으로 덮여져 있었으나 그나마 돌로 용문양이 이곳이 오랜 세월속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석기시대를 시간 여행하는 시간여행자들을 환영하듯이 사해의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반겨주고 있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힐링의 시간이다.

 

부신박물관은 홍산문화의 꽃인 흥륭와유적지에서 원통형 도자기도 보인다. 박물관을 전세냈다.

우리 탐사팀 뿐이다. 박물관 직원들도 신기한 사진을 찍는다. 비파형검도 전시되어 있다. 다리가 세개인 청동유물도 보인다. 오수전도 보인다. 칼모양의 전도 보인다. 청나라 불상도 전시되어 있다.

관광객에게는 유물이겠지만 탐사단에겐 쫑가파에 이르는 스토리가 동행한다. 작은 유리병 속에 검은 모래로 작품을 그려 넣은 시대 예술에도 감탄을 보낸다. 스쳐지나 갔을 아니 대충 ~ 돌아보고 말았을 박물관도 박사님과 함께 라면 새로운 역사가 보이는 것이 학습탐사의 매력이다.

 

부신박물관을 뒤로하고 6시간을 달려 송강하로 이동하였다. 이번 여행의 또하나의 포인트 백두산을 가기 위해서 이다. 늦은 시간 도착한 이곳의 밤공기는 시원했다. 날씨가 춥다고 하였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 였다. 하지만 핫팩을 붙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가장 따뜻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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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학습탐사 Day 5

새벽공부는 백두산에 관한 것이다.  939 1 백두산이 처음 폭발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926 발해 멸망이후 백두산 화산폭발로 발해 부흥운동이 단절 밖에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2800 년전 열점 형태의 마그마가 현재 백두산 천지 10Km 밑까지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백두산 폭발로 지구온도간 6년간 년간 0.85도씩 떨어 졌다고 한다. 폭발 한달 동안 2.25도가 떨어졌다고 한다. 화산재는 제트기류를 타고 14 동안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 백두산 화산폭발로

100여개의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언제 다시 폭발할 것인가? 앞으로 100 이내에 폭발 가능성이 10~20%라고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화산재로 알려진 쇄설물 라하르(Lahar). 라하르(Lahar) 화산이 분출된 퇴적된 화산암괴나 화산재가 흐르는 물에 섞여서 홍수처럼 쓸려내려가는 현상이다. 백두산 금강대협곡의 장관을 내려다

보며 당신의 화산폭발을 상상해 보았다. 939 1 300Km 떨어진 일본에서 백두산 화산재가 발견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2750미터의 정상에서 북한산 높이의 산봉우리가 화산폭발로 날아갔을 것이고 한다. 지난 2000년간 지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가장 화산폭발로 추정한다. 일본에서는 이때 공진을 느겼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번 백두산탐사를 통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 오르며 발해의 멸망과 그들이 다시 부흥을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역사적 배경지식까지도 알게 되었다.

 

백두산 서파코스는 1440개의 계단으로 천지에 이르게 된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가르는 38 비석이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중국은 현재 북한으로부터 일부의 영토를 임차하여 관광객을 받고 있다고 한다. 천지를 바라본 탐사단 일행은 정상에서 박사님의 백두산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현재의 상황이 역사 속의 상황과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현재의 국제정세에

잠시 눈물을 머금었다. 우리의 역사는 고구려 이후 대등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눈이 쌓여 있었다. 덮힌 천지가 박자세 학습탐사팀을 반겨주었다.

가슴 벅찬 순간이다. 우리는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백두산을 이리 돌아 와야만 하는가?

우리 민족을 둘러싼 강대국의 힘겨루기에 한시도 자유로울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천지를 내려와 금강대협곡에서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1000년전

화산폭발로 쓰러져간 지역의 마을과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가슴이 답답해졌다.

산성화 토양에서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자란다고 한다. 협곡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붉은 소나무를 보며 과학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백두산의 지질과 역사에 깊은 감동이 솟구쳐 올랐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빌려 오후학습을 하였다. 광개토 태왕에 관해서 이다. 프레임 8번이다.

이번 학습탐사의 특징은 프레임과 더불어 현장 탐사전에 전해주는 박사님의 사전설명이 유용하게 링크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시각을 가지고 사물과 현상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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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학습탐사 Day 6

봄꽃이 만발한 오늘 첫번째 방문지는 광개토대왕능이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19 왕인 광개토 태왕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묘비로 해동제일의 고비라는 미명을 가지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능은 거대한 돌무덤이다. 능을 오르며 천하를 호령하며 말을 타고 달리는 그때를 그려 보았다.

이어 오회묘를 방문하였다. 고분 내부가 습해서 인지 벽화는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백호와 청룡이 그려진 고구려 벽화를 보면서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장수왕의 무덤은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이다. 무덤주위에는 커다란 돌이 11개가 변에 세워져 있다.

장수왕능은 현재 중국 요녕성 집안시에 있다. 이는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자리잡은 427 장수왕때 평양으로 천도하였는데 당시는 왕으로 추대 되면서부터 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국내성에 있을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의 장수왕능은 평양에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장수왕능 바로 옆에는 고구려왕족의 묘지로 추정되는 장수왕릉 1 동반 무덤이 있다. 계단식 묘실이고 주위에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 있다. 윗부분 거석은 안쪽으로 홈이 파여져 있었는데 이는

비가 안으로 스며 들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집안 시에서 바라본 압록강 건너편 북한의 산들은 민둥산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금방이라도 헤엄쳐서 건너갈 정도의 지척에 북한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압록강 물은 차가웠다. 물살을 세게 흘러갔다. 다시 한번 가슴 아픈 분단의 현실을 뒤로하고 집안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집안박물관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동북공정 이후 중국 정부가 민감해진 양국의 외교정세에 내린 조치라고 한다. 고구려의 유적이 많이 전시 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의 석상도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읽을 있는 시간 이였다.

 

환도산성을 올라가는 다리에 높이를 제한하여 대형버스인 탐사차량은 통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내려서 환도산성을 올랐다. 산중턱에 돌로 성을 쌓아 전시에는 국내성을 버리고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국내성은 지금 시내 한복판에 아파트 사이에 작은 둔덕과 강가의 성벽을 흔적으로

국내성의 성터를 확인할 있었다. 환도산성에 올라 멀리 고구려의 역사의 인물들과 만나는 시간여행이다. 지금 내가 올라 가는 길이 그때의 절박함을 안고 올라가기에는 너무도 세월의 차이가 많이 있었다.

 

국내성 서문유적지는 강가에 위치한 유일하게 고구려시기 성문 유적지를 확인하는 곳이다.

빗방울이 내렸으나 탐사대원들은 모두 한발 한발 몸으로 고구려의 국내성을 체험하였다.

 

서대묘는 포도밭을 지나 황량한 중턱에 돌무더기로 도굴꾼에 의해 헤쳐진 가슴아픈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313 낙랑군을 추출한 미천왕의 능이라고 한다. 중앙이 완전히 파헤쳐져 있고 이는 일반 도굴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대대적인 파손이라고 본다고구려 고국원왕때 전연의 모용황이 침입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파헤쳐 간 사실이 이 무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천추묘는 집안 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마선하 언덕에 위치하며 그 모양이 거대하여 구릉과도 같다. 1936년 무덤 위에서 "천추만세"란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나왔기 때문에 천추묘라고 한다. 천추 무덤의 규모는 장군총 300평보다 훨씬 넓다고 하는데 무덤은 심하게 파괴를 받아왔기 때문에 기단석이 많이 유실되고 네 귀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무덤꼭대기는 비교적 평편하며 그 면적은 약 400평방미터이며, 지금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면 장군총과 태왕릉 건축양식과 같은데 안타깝게도 멀리도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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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학습탐사 Day 7

새벽학습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프레임9번은 수. 당 고구려전쟁과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관한 이야기 이다. 북방민족과 중원 그리고 한반도의 정세는 통일된 국가가 근거리 외교권을 가지고 밀도 당기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해상로를 장악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적인 세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독립된 전쟁이 아니라 국제전으로 보아야 한다.

박사님의 새벽 강의을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대전의 판도를 바꾸는 이러한 전쟁들을 통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앞으로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었다. 시각의 차이에 따라 그 동안 배웠던 역사의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오전에 요녕성 본계시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 박물관을 지나 오녀산성에 올랐다. 고구려시대의 산성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맨 처음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37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수도로 삼은 졸본성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40여년 후 유리왕때 이곳에서 지금의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어제 방문한 국내성과 환동산성이 바로 그곳이다.

 

정상을 오르는 계단 중간 중간에 사이로 비스듬이 길이 나있다. 말이 산성까지 그 길을 따라 올라갔다고 한다. 정상부분은 마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테이블 마운틴처럼 책상모양을 하고 있는 이곳은 천혜의 요새이다. 양지바른 곳에 왕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주정하는 주줏돌이 발견되었다. 정상에는 천지라는 연목도 있는데 이곳 바로 옆에는 정화된 물이 나오는 작은 우물도 있다. 백성들은 반지하 주거지에서 생활한 흔적들이 보인다. 아직도 발굴현장이 곳곳에 공사 중이다


해발 804미터 정상 거점장대에 오르니 전망대로는 최적의 장소이다. 동시에 동, , 남쪽을 모두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훈강 수로를 감시하는 중요한 초소라고 한다. 동쪽 성벽도 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암석강의도 듣고 탐사는 계속된다. 5월의 화창한 날씨에 남쪽 성벽을 따라 내려왔다. 마치 계룡산 어느 산길을 걷는 듯 편안하고 익숙하고 옛 고구려의 선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 온듯하다.남쪽성벽은 돌로 축조 되었으며 길이는 약 140미터 정도 이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는 길 연초록의 숲길이 너무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졸본성을 거닐고 있다.

 

오녀산성을 내려와 고려성에서 혼강을 바라보며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국내성. 졸본성. 고려성.

점심을 먹고 난 후 상고성자 고분군를 돌아 보았다. 입구에 세워진 비석이 없었다면 들판의 돌무더기로 그냥 지나칠 것만 같았다. 상고성자 고분군은 요녕성 환인현 육도하자향 상고성자촌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인근에 혼강과 육도하, 그리고 하고성자 유적지가 있다. 고분군은 동서 200m, 남북으로 1500m 가량 범위로 펼쳐져 있다. 지금은 겨우 20여기 정도만 남아 있다.

 

상고성자 고분군의 돌무지무덤은 집안 지역에서 1~3세기에 유행하던 돌무지무덤과 유사한 형태로서 대체로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곳에서 후기에 등장하는 봉토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주민집단의 고분군 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상고성자 고분과 하고성자 평지성에 살던 주민과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버스 안에서는 프레임 암기 테스트가 열심이다. 일기예보에 비가 내린다고 하였는데 다행히도 유적지를 모두 돌아보고 이동 중이나 주로 밤에 비가 내렸다.

 

이번 탐사의 마지막 코스인 석대자산성으로 향한다. 중국 요녕성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20여㎞ 떨어진 기반산 풍경구에 위치한 이 산성은 1987년 선양시 문물조사대에 의해 발견됐다고 한다성벽의 총 둘레는 1,375m로 그리 길지 않지만,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에서 직각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시설) 10개나 되는 보기 드문 산성이다.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에서 치가 가장 많다. 이와 함께 성의 수구(水口)도 확인할 수 있어 고구려성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양시는 1990, 97년 두 차례에 걸쳐 석대자산성을 발굴했다. 이때 철기, 토기, 쇠화살촉, 갑옷편 등의 유물과 함께 성 내부에서 건물터와 부엌 등과 같은 주거 유적이 발견됐다. 발굴을 마친 선양시는 1998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성벽, , 문루 등 석대자산성의 일부를 복원했다. 스키장, 스케이트장, 삼림욕장, 민속촌, 놀이시설 등이 들어서 있는 기반산 풍경구의 관광유적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특히 선양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자는 게 복원의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하지만 탐사팀이 방문하였을때는 폐쇠돠어 산성을 오를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처음 참가한 대원들의 참가소감을 듣고 박사님의 마지막 프레임10. 강의를 들었다.

창의적 도구 13가지이다. 1. 관찰 2. 형상화 3.추상화 4.패턴인식 5.패턴생성 6.유추 7.몸으로 생각하기 8.감정이입 9.차원적사고 10.모형만들기 11.높이 12. 변형 13. 통합.

 

우리의 신체는 실험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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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Day 8.

이번 탐사는 홍산문화를 포함한 요하문명의 발상지가 있는 내몽골에서 고구려 역사가 가득한 만주 그리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까지의 대장정이였다. 모두 건강 하게 탐사를 마칠 수 있었다. 빡빡한 일정에도 모두 한 마음으로 학습에 몰입하였고 대부분의 대원들이 프레임을 모두 암기할  있었던 것은 집단 학습분위기가 한 몫 하였다. 박사님의 현장감 있는 열강과 대원들의 뜨거운 학습열기는 탐사내내 계속되었다.

 

프레임은 간단하고 암기는 반복을 통하여 가능하였다. 프레임과 프레임은 서로 연동가능하며 간단하게 기억에서 인출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해단식을 하기전까지 도착 강연은 이번 탐사의 종결판이라 할 수 있다.

 

범부여적 의식! 부여가 답이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 떠난 이번 탐사의 최고의 수확이다.

고구려,백제,발해의 부리는 부여이다. 철갑과 철편의 원조 부여. 부여적 의식을 통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7 8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돌아 왔지만  아직도 탐사 중 스쳐 지나간 순간 순간들의 이미지가 눈

앞에 선하다. 흥륭화 유적지의 벌판의 바람과 사해유적지의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오녀산성에 절벽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도 생생하다.  

 

역사와 자연, 자연이 주는 역사의 단절성, 처절하게 파헤쳐진 돌무덤의 현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함께한 대원들과 미지의 세계로의 탐사를 잘 이끌어준 탐사대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기억이 흩어져 바람에 날라가지 전에 탐사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소통가의 기억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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