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에서 끝없이 질문을 합니다.

잘 살고 있는지? 잘 먹고 있는지? 비는 오지 않을까? 친구한테 전화는 왜 안오지? 등등등 말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삶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질문의 연속이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예측을 하고자 함입니다.

질문을 하고 예측을 얻어야 디폴트모드로 전환하여 에너지를 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상에 매몰된 예측을 하는데 대부분 쓰이고 있습니다.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될 일에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질문의 일상화로 인해 질문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심코 질문을 던지고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s Knot)을 칼로 잘라 풀어낸

알랙산더 대왕의 즉각적 해답을 원합니다.

질문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기를 원합니다.

골치아픈 생각 안하고 빠른 지름길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녹녹치가 않습니다.

질문에는 내가 주체가 되는 고뇌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제대로 못만나는 것은 제대로 된 '결정적 지식'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결정적 지식을 만나야 결정적 질문이 나옵니다.

주기율표의 원자번호를 스핀 업 다운의 궤도로 들여다보고 광합성과 호흡이 '제어된 전자이동'을 통한

산화와 환원과정이라는 결정적 지식과 만나면 빛의 색깔이 보이고 생명과 죽음과 삶에 대한 질문까지

던질 수 있습니다.

2,500년전 피타고라스가 수의 규칙을 발견하고 "세상은 數다(All is Number)"라고 했던 것도 결정적 근원의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질문은 뼈에 사무쳐야 합니다.

명심보감 존심편에 "念念要如臨戰日 (염념요여림전일) 心心常似過橋時 (심심상사과교시)"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 생각마다(念念)  싸움터에 나아가는 날처럼(臨戰日) 해야 하고,   마음마다(心心)  늘(常) 다리를 건너는

   때처럼 (過橋時)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전쟁터에 나가는 날처럼 비장하고 절실해야하고 마음마다 항상 주위를 살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은 질문을 만날때도 같아야 합니다.

결정적 지식을 만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대로 묻기 위해 결정적 지식을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결정적 지식을 보여주는 곳이 박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