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좌충우돌, 초짜회원의 천문우주 발표기 2008-02-10 21:09
이혜로 ( hyero11 ) | 조회: 1,529  댓글: 10 http://www.100books.kr/?no=6939

필진 전재영님의 '세월의 가속도'를 읽으면서
백북스라는 새로운 경험이 나의 세월의 속도를 등속도운동으로 전환시켜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스키어가 일자스키로 활강하며 멈출줄 모르듯 서른을 갓 넘긴 나의 하루하루가 스스로 제어가 안되서 고꾸라져야만 멈출것 같은 완전초짜 스키어의 모습같았다.
전재영님은 세월의 가속도를 늦추는 간단한 방법으로 신선한 체험과 그 강렬한 기억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게 천문우주모임이 있기전 2주간이 바로 그런 신선한 경험의 날이었지 싶다.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20분간의 발표, 2주간 준비하면 그거하나 못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학교다닐때 과학 시간에 별에 대해서 배웠을텐데 당췌 기억나는 게 없다. 가발쓰고 다니셨던  대머리 과학선생님 얼굴만 풍선이 되어 둥실 떠오를뿐.
 
기초가 어느정도 있어야 준비가 될텐데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자료들 앞에 난 눈뜬 장님이었다.
며칠을 자료수집에 나서고, 지구과학II 수능동영상을 통해 별의 진화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서점가서 문제집 사다가 풀어보고..
하지만  이건 뭐 발표해야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본개념 익히기에도 바빴다.
진도가 안나가니까 천문우주 총무인 경목씨만 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일주일쯤 파고드니깐 내게도 행성상 성운에 대한 질문들이 생겼났다.
A4용지로 정리하니 5장쯤 나왔다. 이걸 누구에게 물어볼까...박사님께 물어본다는 건 당시 생각도 못했다.
왜냐하면 박사님이 말씀하시길, 자료 어딨어요? 라고 묻는 사람이 제일 바보멍충이고 스스로 찾아 공부하는 것이 참된 공부라고 못박으신 마당에
스스로 바보가 되어 박사님을 찾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나름대로 그렇게 해석했으나, 나중엔 오히려 물어보지 않았다고 혼쭐이 났다.ㅠㅠ)
 
인터넷 자료 검색하다보니 모대학 과학교육과 교수님께서 행성상성운에 대해 연구논문 발표한 것들이 검색되어 아, 이분이다. 하고 무릎을 쳤다.
결국 휴가를 내어 교수님을 찾아뵈었지만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 대학 조교가 교수님 전화번호는 물론이거니와 교수님 나오시는 시간조차도 완전 일급비밀에 부쳐버리는 바람에
정말 애를먹었다. 공(公)을 철저히 공(公)에 붙히는 것이 그 조교분의 철학이라고 하시니 할말이 없었다.
 
우여곡절끝에 찾아간 학교는 방학이라 썰렁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퍼졌다. 교수님 방을 찾는데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건 교수님을 만나뵈는 것에 대한 긴장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양심의 가책 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님이 설명하시는 걸 한번에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걸 이해해야 발표를 할 수 있을텐데...거의 유일한 희망인 이것을 나의 무지로 놓쳐서는 안되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고 또각또각 복도끝을 몇번이나 왔다갔다 한 후에 결국 목에 걸고 있던 mp3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똑똑똑' 교수님 방을 노크했다.
모든것이 몰래 녹취되는 순간이었다. ㅠㅠ
 
연구시간을 쪼개어 친절히 설명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발표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백북스에 대해 소개하고 막바로 질문에 들어갔는데 교수님이 계속 질문을 skip 하시는 거였다.
이건 오늘 아침 석사들과 세미나 했던 내용이니까 건너띄고, 이건 박사과정 하는 사람이 연구하는 거니깐 건너띄고 이거 설명하려면 2-3주간 강의해도 모자란다
해서 건너띄고.. 하여튼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스터디하기에 너무 깊게 들어가는 부분이니까 모두다 건너 뛴다는 것이다.
뭘 좀 알아야 더 깊이 물고 늘어져서 질문을 할텐데 당췌 아는게 없으니 건너띄자 하시면 그냥 건너띄는 수밖에.
주인닮아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mp3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데... 참 난감했다.
 
그러다가 교수님 말씀하시길, 내가 가지고 온 질문지를 복사 좀 하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타이핑 친 질문지에 나 특유의 글씨체로 고딩 수준으로 적어놓은 고민의 흔적들을 아니, 왜, 무엇때문에 복사?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알고보니 직장가진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석사과정을 하고 있지만 잘 나오지 않아 내 질문지를 가지고 혼쭐을 내주겠다는 것이다.
아마추어들도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 좀 나오라고 하시겠다는 것.
그러면서 다시금 백북스가 뭐하는 곳이냐고 자세히 물어보시고는 천문우주에 관해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별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참 뿌듯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mp3를 다시 들어보니 행성상성운보다는 망원경에 관한 이야기들만 주구장창 흘러나왔다.
 
의문들이 풀리지 않은채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완전 좌절의 기분을 맛보야야 했다.
이 교수님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모임은 코앞으로 닥쳐오고... 바로 그때 박 박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내게 공부를 어떻게 하라고 방향을 알려주셨는데, 여기에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박사님이 가지고 계신 신판책과 내가 가지고 있는 구판책의 페이지가
달라 알려주신 부분 말고 완전 엉뚱한 부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췌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아 급기야 밤 11시에 못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려고 박사님에게 전화를 했다가 그런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혼쭐만 났다.^^
그러다가 결국 박사님께서 스캔해서 보내주신 책의 일부를 받아보았는데,
우와~거기에 내가 A4로 정리한 질문지에 대한 답이 죄다 들어있는게 아닌가?
순간 '심봤다'를 외쳤다!!
.
발표 3일 남겨놓고 미친듯이 파워포인트 작성하고 스캔해주신 자료를 5번 읽으니까 이해되고 10번 읽으니까 내용이 그려지고 20번 읽으니까
외워졌다.
 
지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떨면서 그때를 회상하지만
정말 그때의 그 압박이란 후~ 다시 경험하라면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나리 회원의 '전깃불'이야기를 제일 공감한게 아마도 나였을테니깐..^^
 
엄청난 압박의 결과는 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값진 열흘간의 기억을 주었고, 그리고 내가 백북스에 한발 더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기모임의 뒷풀이를 몇번 참석하면서 회원들이 자유발언하는 것들을 듣고 이건 무슨,  또하나의 종교집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만큼 다들 이 모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그런 이들을 보면서 여긴, 한가하게 뒷짐지고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님의 권유로 모임 안으로 확 빨려들어온 초짜회원인 나는 이번 설연휴에도 '뇌와 생각의 출현'이라는 박사님의 강의를 10강까지 연달아 듣고 있다.
미국드라마 '24'이후로, 드라마도 아닌것에 이렇게 몰입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실 박사님이 잭바우어보다 잘생겼을리도 그 강의가 24보다 재미있을리도 없다.(이건 내 생각일뿐. 여기 최연소 회원을 비롯하여 적어도 4명의 회원은 박사님이 잭바우어보다 잘생겼다고 우길것임 ^^.)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선 박사님이 우리 앞에서 토해내던 그 엄청난 열정을 억제하며 설명하시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선했고,
순간적인 긴장과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24와 달리, 계속된 물음을 이어가게 하는 박사님의 뇌과학 강의는 동영상 다시보기를 계속 누르게 만들고 있었다.
 
기회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고 그것이 나의 생각과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또한 완전 부끄럼쟁이라 맘만 있을뿐 실행에 옮기기 힘들었던 소모임 참석도 좀 더 쉽게 되었다.
새해 결심은 늘 작심삼일이었는데, 100북스 모임에 100% 참석하겠다던 새해 다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별과 뇌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행성상성운을 공부해보니, "별들은 수명을 다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의 모든것을 우주로 환원하고
별의 일생 중 그 어느때보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별이 청장년기에 핵융합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중원소와 에너지를 생성하고 식고 수축하고 고온이 되고 핵융합을 일으킨
결과인것 같다.  결국 살아있을때 열정을 다했기에 마지막 순간에 아름답게 환원할 것들이 있지 않나 싶다.

 
아직은 내공이 없어 배우기만 할 것이지만 거듭된 수축으로 언젠가는 한번씩 핵융합에 도달할 날이 있을찌니 배운것을 내놓고 함께 공유할 아름답고
환상적인 날들을 기대해본다.
 
아, 왜 이렇게 글이 길어졌냐, 짧고 간결하게 쓰는날도 기대해본다.
기회주신 박사님께 감사드리고, 도움주신 혜영씨, 나리씨, 경목씨도 감사드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