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9

 

어제 밤엔 바람이 세차게 불어 텐트자락이 펄럭거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비라도 올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와 텐트를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바람소리와 더불어 텐트자락이 펄렁펄렁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새벽 4시쯤 일어나니 바람도 잠잠했고, 하늘에는 별도 총총했다. 별이 하도 밝아서 별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동안 별자리를 보며 앉아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하늘처럼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박사님도 “어릴 적부터 별과 친해지도록 교육을 시키면 공간에 대한 사유가 넓어진다.” 고 하더니 전적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릴 적에 마당의 평상에 누워 할머니가 일러주는 별자리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맨 날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들어도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몽골을 뜨는 날이다. 새벽 별자리 공부는 휴강을 했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이것저것 치우랴 남은 식품을 정리하랴 각자의 짐을 꾸리랴 바쁘게 돌아갔다. 제일 부지런하게 왔다가 갔다가하는 사람은 임동수님 이었다. 그 다음은 김현미님으로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총 감독이니까! 이원구님과 솔다렐라님은 엊저녁부터 텐트공구를 챙기더니, 이슬이 마르기를 기다리는지 텐트는 그대로 있다. ‘고충오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이곳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퍼졌다.

동이 트니까 동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금빛 사이로 회색 구름이 끼여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어 더욱 더 아름답게 보였다. 해가 오르니 바위 그림자가 생겨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사방이 훤해졌다. 시간도 있고 해서 걷고 싶은 생각이 나기에 멀리까지 걸어갔다. 아침에는 이슬이 많아서 산책을 하면 신과 함께 양말이 푹 젖는데, 어제 밤에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늘은 괜찮았다. 아침엔 젖는 게 싫어서 잘 안 걸었는데 오늘 같은 날이면 얼마든지 걸어도 좋을 듯했다.

“식사하세요!” 남영진님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식단은 어제 남은 하이라이스와 카레를 합친 밥, 얼큰하게 끓인 누룽지, 그리고 된장국도 있었다. 남은 밑반찬은 전부 내놔서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뚝뚝 떨어졌다. 사막의 날씨는 정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하늘은 맑은데 비가 오다니! 혼자서 투덜거렸다. 조금 후두둑거리며 오던 비가 금방 그쳤다. 그 동안에 텐트도 다 걷어 정리를 했고 남은 쓰레기 중에 태울 것은 다 태워버렸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갖고 갈 것은 모두 정리해서 차에 실었다.

이번 탐사의 영상담당 임지용님! 어딜 가나 다리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많이도 뛰어다녔다. 젊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 같았다. 본인은 힘들겠지만, 무거운 것을 들어도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까!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도 못해주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뭘 찍는지 바쁘게 다니면서 카메라를 눌러대고 있다.

출발하기 전, 박사님이 오늘 일정을 이야기했다. 갈 길은 400km 정도이다. 비포장도로를 80km 달리는데 2시간, 그 다음부터는 포장도로라서 6시간~8시간정도 걸리니 대략 오후 6시쯤 울란바토르에 도착한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샤워도 가능하다는 말에 대원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열흘간 한 번도 샤워를 못해서 찝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저녁은 근사한 몽골식당에서 음식도 실컷 먹고 술도 마음껏 마시게 한다고 하니 와아! 하며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다가 들릴 곳은 별로 없지만, 들릴만한 데가 있으면 들릴 수도 있다. 오늘 일정은 전적으로 유로 선생님께 맡긴다고 했다. 출발하기 전에 유로 선생님, 기사님들과 함께 단체기념촬영을 하고 박수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며칠 전에 수저를 잃어버려 서광원님이 빌려주었는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수저를 돌려드렸다. 떠나기 전에 드려야지 잊어버릴까봐 생각날 때 얼른 드렸다. 건망증이 심해서 물건을 잘 잃어버려 좀 창피한 노릇이다.

출발시각은 오전 7시 35분이었다.

떠나기 전에 보니 고충오수의 초원은 풀이 다른 곳보다 크게 자라서 길었다. 건너편에서 풀을 뜯던 양과 염소는 어느새 바위 위에 소복이 올라앉아 있었다. 우리가 떠나가는 걸 보려고 올라갔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서 너 곳에서 재두루미 비슷한 새를 여러 마리 보았다. 비가 와서 늪이 많이 생겨서 그런지 늪 근처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버스에서 8시 20분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총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탐사진로는 울란바토르에서 아르항가이, 바양호고르, 울란바토르로 이어지는 루트로, 몽골탐사의 황금루트라고 불리는 곳을 우리들이 밟은 것이라고 했다.

몽골을 세운 민족은 흉노, 선비, 유연, 돌궐, 거란, 몽골이다. 16, 26, 36과 1234를 외워라! 1234년은 징기스칸이 금을 멸망시킨 해이고, 916년 요나라 건국, 926년 발해 멸망, 936년 연운16주를 획득한 해이다.

징기스칸은 메르키트(말갈), 타타르(수달, 산달), 키레이트, 나이만(서요) 등 네 부족을 정벌하고 1206년 대칸에 즉위했다. 몽골은 할하몽골(타타르), 서 몽골(오이라트), 중가르(질지 장군 사망)로 나누어져 있었고, 징기스칸은 할하몽골 쪽이었다.

17세기 촉특타이지는 청해 지역에서 사망했다.

10세기에 지은 거란성, 거란은 요를 세우고 남명관(중화민족을 다스림) 과 북명관(요나라 민족을 다스림)을 두었다.

위구르의 수도였던 성터, 위구르족은 예니세이강을 타고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그 당시 서요를 유럽에서는 성 요한의 나라라고 믿고 찾아 나선 것이 대 항해의 시점이 되었다. 캐세이퍼시픽(cathaypacific)은 여기에서 나온 말인데, 지금은 항공사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몽골은 아무르 강을 건너 러시아까지 정벌했다.

화산분화구(현무암)에서 차강로르 호수를 거쳐 게르를 방문했다.

그 다음은 항가이 산맥에 있는 흉노의 적석목곽분을 보았다.

보살상이 있는 암각화를 보고 겔룩파의 라마교사원을 가서 둘러 보았다.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부쳐준 사람은 오이라트의 칸인 알탈칸(1507~1582)이었다.

자연사박물관의 육식공룡 타르보사이러스를 보고, 역사박물관을 견학했다.

쫑카파의 『비밀도차제론』, 고려 제관스님의『천태사교의』, 당나라 법장스님의『화엄오교장』, 등은 불교를 아는데 지침이 되는 책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제 1대 벅뜨이며 달라이라마 칭호를 처음 받은 잠마바자르가 처음으로 절을 세운 곳이다.

협곡에서 접촉변성암과 강력변성암을 보면서 학습했다. 그 다음 코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는데 수정결정체도 있었다.

지금까지 다니고 본 곳을 대략 총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전 8시 52분에 마쳤다.

아직 비포장도로이고 밖에는 비가 세차게 뿌리고 있었다. 어제 몽골 북쪽지방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있더니 그래선지 바람도 세게 불고 좀 추웠다. 다니는 동안 낮에는 더웠는데, 오늘은 모두들 춥다고 하면서 옷을 꺼내 입었다.

가다가 10분 휴식을 했다. 나갔다 온 분들이 “어! 추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바람이 세니까, 볼일 본다고 가린 보자기가 펄럭거려서 여럿이 붙들고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내리지 않았는데 바깥 날씨가 추운지 모두들 으, 아, 어 등의 외마디로 추위를 표현했다.

비도 오고 춥지만, 초원은 푸른빛을 잃지 않고 들판에 펼쳐져있었다. 떠나기 전에 저 푸른 초원을 눈에 가득 넣어가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포장도로로 진입을 했다. 오전 9시 18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김철원님과 고속도로에는 몇 분에 들어가게 될까? 내기를 했다. 나는 35분이라고 했고, 김철원님은 20분이라고 했다. 김철원님의 승리로 싱겁게 끝이 났다. 박사님 말로는 2년 전에는 지금 지나가는 이 도로가 비포장이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또 어떻게 바뀔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탑이 죽 늘어서 있는 곳에 내렸다. 탑마다 앞면에는 말이 두 마리, 양면 옆으로는 말 한 마리가 새겨져 있고, 각 면마다 팻말이 붙어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말머리 조각이 세 개, 탑이 네 개 조각되어 있었다. 들어가 보니 가운데에 철책을 둘러놓은 곳에 말의 동상이 있었다. 2007년 8월 25일에 세운 동상인데, 아래쪽에 있는 동판에는 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유로 선생님이 말했다. 설명에 의하면, “아라고르혜”라고 부르는 이 말은 298년 전, 1,000 마리의 말이 뛰는 경주에서 일등을 한 말이었다. 그런 훌륭한 말을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 도시이름도 말 이름을 따서 “아르바이르”라고 한다고 했다.

철책 주위로는 몽골의 상징인 푸른 천을 빼꼭히 감아서 둘러놓았다. 거기에다 푸른 천을 많이 감아놓은걸 보니 이 말을 신성시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뿐만 아니라 몽골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사랑하는지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기념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철책에는 푸른 천만이 아니고, 노랑, 빨강, 초록 등의 천들도 섞여 있어 알록달록했다.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는 청동 말은 웃는 모습이었다. 몽골사람들도 많이 와서 구경하는 것을 보니 꽤 유명한 명소인 것 같았다.

버스에 올라 얼마 안 달려서 제법 큰 도시가 나왔다. 규모가 큰 이 도시는 ‘아르바이르’라고 했다. 도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쓰레기더미가 보이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그 밖에 놀이터도 보이고, 길가에 서있는 불상도 보였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부쳤다가 떠보니 비가 청승맞게 오고 있었다. 울란바토르로 가는 도중에 보이는 초원은 풀이 빈틈없이 자라고 있어서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 했다. 양떼와 소떼가 많이 보였고 승마용 말들을 기르는 목장들도 더러 보였다. 게르도 많이 밀집해 있는 곳도 있고 서 너 채가 떨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다시 박사님의 버스 강의가 시작되었다.

인류가 가축을 이용해 태양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서 최초로 기른 것은 염소와 양이였다.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처음에는 수렵과 채취를 했다. 남자는 사냥, 여자는 나무열매나 풀뿌리 등을 주로 채취했으나 거주할 집이 없었다. 호주의 에보리진, 아프리카 피그미족이 그들이다.

그 다음은 이동식 집과 식생활을 하기 위한 도구를 사용하는 유목생활이었다. 대규모의 초지위에 거대한 초식동물인 소, 말, 양, 염소 등을 가축화하였다.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마음을 읽어야 할 필요성에 의해 종교나 예술 등 토테미즘이 생겨났다. 지상에 풀이 생긴 것은 3,000만 년 전이며, 현재와 같은 초지가 이루어진 것은 1,000만 년 전이었다.

세 번째,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집이 생겼다. 2~3만년 사이에 가축과 농업을 함께 하면서 문화의 대폭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야생식물의 종자를 채취하고 보관해서 농사를 지었다. 점점 삶이 안정되면서 농경사회가 이루어져 사람이 모여 살게 되자 자연스레 초기 도시가 이루어졌다. 농경사회는 집이동이 없고 인공적으로 식물을 심어 삶의 공간이 조성되었다. 그에 반해 유목민들은 가축한테서 에너지를 얻었다. 풀을 이용하여 가축에게 먹여, 가축을 사람이 먹는 관계를 가지고 삶을 영위했다.

유라시아대륙의 유목민들이 최초로 가축화한 동물은 순록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왜 문명이 시작되었나? 하면 야생동물의 가축화로 인해 에너지섭취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은 말을 잘 탔기 때문에 속도를 갖고 있어서 몽골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옛날엔 유목민이 속도를 갖고 있어서 세계를 재패했지만, 오늘날에는 농경민이 속도를 갖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세계를 재패하게 될 것이다. 농경정착이 근원이 되어 에너지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시각은 낮 12시 반이다. 좀 더 속도를 내면 좋으련만, 시속 65km가 초고속도였다. 버스가 고물이라서 속도를 많이 못내는 것 같았다. 비는 아까부터 치적거리며 오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둔 ‘한몽리조트’라는 간판이 눈에 뜨였다. 게르가 여러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근처에 양, 낙타, 말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니 여행사 단체를 받는 곳인 듯 했다. 아무튼 한글이 보이니 반가웠다. 울란바토르에서 ‘서울의 거리’라는 곳을 갔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버스에서 보니 모래언덕이 길게 뻗어있는 곳이 보였다. 임지용님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카메라에 담는 소리가 찰칵찰칵하고 들렸다.

앤디님이 20km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제하늘에 구름은 남아있지만 날이 개었다. 해가 나오니 초원의 풀이 더 새파랬다. 그 위로 수백 마리의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전원의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그 속에 삶과의 투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도시가 가까워졌는지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마을이 나왔다. 스타렉스는 다이야 구멍이 나서 고치러가고 우리들은 몽골식당으로 들어갔다.

몽골식 불고기백반과 고릴테 슐이라는 칼국수가 나와서 실컷 먹었다. 불고기백반은 밥을 동그란 기둥처럼 세워놓아 감자인 줄 알았더니 밥이었다. 칼국수는 쫄깃한 국수면발이 아니고 찰기가 없어 툭툭 끊어지는 국수였으나, 구수한 맛이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몰라도 내 입맛에는 맞아서 잘 먹었다. 주위에 스님 도반들이 ‘법념 스님이 안 맛있는 게 뭐가 있나?’ 라고 할 정도로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라 어딜 가도 음식 때문에 걱정할 일은 별로 없다. 그 외에 우리들이 준비해온 시리얼과 우유, 누룽지, 카레자장밥, 오이피클, 깻잎조림 등도 등장을 했다. 그런데 식당 천정에 물이 새서 두 곳에다 큰 그릇을 받쳐놓았는데 물이 가득 차있었다. 비가 그쳐서 다행이지, 아니면 빗물이 넘쳐 흘러내렸을 것이다. 식당내의 분위기는 어쩐지 좀 어수선했다.

식당의 주방 쪽으로 나오니 따끈한 몽골 차가 큰 포트에 가득 들어 있었다. 마셔도 되느냐고 유로 선생님에게 물으니 마음대로 마시라고 했다. 따라보니 버터가 들어갔는지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찻잎도 들어 있었다. 차를 끓일 때 찻잎, 우유, 곡물가루, 소금, 버터 등을 넣어 끓인 것으로, 티베트에서 마셔 본 차 맛과 거의 비슷했다. 티베트에서는 치즈도 넣었는데 몽골 차에는 치즈가 들어 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분들에게도 권했는데,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차를 잘 마시기 때문에 큰 잔으로 넉 잔이나 마셨다.

식당에서 나오니 마을에서 키우는 흰 돼지 여러 마리가 뒤뚱거리며 헤집고 다녔다. 또 비가 와서 질척거리는 땅에는 참새와 비둘기도 놀러와 뭔가 주워 먹고 있었다. 화장실을 물었더니 손으로 가리킨다. 우리네 옛날 뒷간과 똑 같은 구조였다.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밑을 내려다보니 겁이 나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앞으로 260km를 더 달려야 한단다. 출발시각은 오후 2시 32분이었다. 조금 전엔 해가 나더니 출발하자마자 또 비가 내렸다. 울란바토르까지 얼마나 걸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포장도로라고 해도 곳곳에 패인 곳도 많고 비도 오니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녀보니, 몽골사람들은 푸른색을 좋아하는지, 성스러운 곳이나, 돌로 쌓은 탑이나, 오래된 고목이나, 큰 바위 등에 파란색 천을 감거나 매어 놓은 곳이 눈에 많이 띠었다. 왜 그런가? 옆에 앉은 신양수님에게 물어보았다.

몽골은 드높은 파란 하늘과 드넓은 푸른 초원이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몽골의 상징은 푸른색이다. 몽골이 이슬람국가를 정벌했을 때, 종교는 인정을 했었다. 그러나 사원은 몽골의 상징인 푸른색으로 지으라고 해서 푸른 타일을 쓴 이슬람사원이 많다고 신양수님이 대답해주었다. 잘 모르긴 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대답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사이에 버스에 문제가 생겼다. 부릉부릉하며 가다가 멈추고, 조금 가다가 멈추더니 드디어 멈춰버렸다. 어디가 문제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버스 기사님이 차에서 내릴 때 혀를 내밀면서 눈을 찡끗하는 걸로 봐서 좀 곤란한 문제인 듯 했다. 뒤 따라 오던 차에서 몽골기사 뭉크가 오더니 급히 가서 보조탱크의 연료를 가지고 왔다. 버스에 연료가 떨어진 걸 몰랐던 것이었다. 오래된 구형이라 버스가 출발할 때마다 앞에서 기사 아들인 마그네가 쇠막대를 넣고 돌려줘야 부르릉 하고 엔진이 돌아가는 차였다. 그런 버스니까 연료계량기가 있을 턱이 없으니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아무튼 해결이 되어 다시 달리게 되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식곤증으로 졸다가 눈을 뜨니 넓은 강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위를 지나는데 제법 긴 다리였다. 몇 시냐고 물으니 오후5시라고 했다. 초원의 푸른빛이 비를 맞아서 더 푸르게 보인다. 풀이 짙어서 그런지 푸른빛이 시시각각 다르게 보였다. 진초록, 연초록, 연두색, 연갈색, 황록색, 녹갈색, 청록색 등등, 하나의 캔버스 위에 파스텔 톤의 푸른 물감을 마구 흩뿌려 놓아 농담이 생겨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끔씩 검은 바위라든지 황토색 흙이라든지, 짙푸른 관목들이 있어 초원의 그림을 더 멋있게 만들어 주었다. 나무 널빤지로 울타리를 친 몽골의 집들도 하나 둘 보였다. 푸른 대문과 원색의 지붕들은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눈에 설었었는데 자꾸 보니까 눈에 익어서 정이 드는 것 같았다.

버스 강의실이 문을 열었다.

인간의 기억은 의미로 기억되지 않으면 기억이 안 된다고 했다. 『뇌와 기계』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인간은 패턴의 서열을 기억한다.

신피질은 패턴의 서열을 기억한다.

불변표상, 자동연상회상, 자동연상

의미를 계속 살리자!

의미를 가지고 사물을 보자!

의미를 유지한다.

다음에 강의할 뇌 과학과 관련이 있는 강의였는데, 뇌 과학에 대해 너무 몰라서 단편적인 단어만 나열해 놓았다.

솔다렐라님이 내 뒤에 앉아 의문을 제기했다. 몽골은 땅도 넓고 초원도 이렇게 넓은데 길이 왜 꾸불꾸불하게 되어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글쎄! 알아야 대답을 해줄 텐데 모르니까 답답했다.

늪이 있거나 얕은 강이 있는 곳에는 재두루미가 있었다. 적게는 서 너 마리에서부터 많게는 열 마리도 넘었다. 가는 길에 늪이 많아서 그런지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몽골사람들은 물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니, 새들의 먹이가 풍부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달릴 거리가 435km라고 하는데 382km 지점을 지났으니 53km가 남았다.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할 것 같았다.

박사님이 48p를 열어 보라고 했다. 몽골의 황금순환여행 (Mongolian Golden Circle Tour)이라는 지도가 있었다. 우리 학습탐사대가 대략 이 순환코스를 돌았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책을 만들 예정이니 발표자는 미리 나섰으면 했다. 발표내용은 티베트 불교사, 유목민제국의 역사, 몽골의 밤하늘, 몽골의 역사, 몽골의 풍습, 몽골의 공룡 등이었다. 자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발표자가 나왔는데, 티베트불교는 김현미님, 몽골의 밤하늘은 홍종연님, 김양겸님, 몽골의 역사는 손경덕님, 몽골의 풍습은 박순천님, 몽골의 공룡은 솔다렐라님이 맡기로 했다. 아마 돌아가면 더 많은 지원자가 나올 것 같았다.

도시가 가까워졌는지 철로가 보였다. 어디로 이어지는 철로인지 궁금했다. 러시아? 아니면 중국? 유라시아로 이어진 철로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지나갔다. 409km지점을 지나니 4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하얀 선이 선명했고 교차점에 로터리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을 물으니 오후 7시라고 했다.

집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층집도 보였다. 이층집은 앞으로만 창문이 있었고, 이곳의 집들은 시골집과는 달리 벽을 두껍게 한 듯 했다. 가는 길에 대형마트가 몇 개 보였고 낮은 언덕 위에는 집과 함께 게르가 많이 보였다. 거의 뜰 안에 게르가 한두 채 있는 것 같았다.

울란바토르의 도심지로 점점 접어드니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육이오동란 이후에 부산의 산중턱에 닥지닥지 붙어 있던 판자촌과 흡사했다. 마당도 없고 추운 곳이긴 하지만, 꽃 하나 심어 놓은 집을 본적이 없었다. 기후 때문에 메마른 생활을 하게 된 걸까? 화물을 가득 실은 기차가 철로를 따라 지나갔다.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서니 6차선 도로였다. 높은 빌딩, 주상복합아파트 등이 도로변에 보였다. 비가 많이 왔는지 아스팔트가 군데군데 패인 곳이 많아 물이 고여 있었다. 도심지로 들어갈수록 교통체증이 심해져서 완전히 거북이걸음이었다. 도로 가운데는 넓게해서 가로수를 심었는데, 죽은 것이 더러 보였다. 가로수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시골과는 달리 도심에는 승용차가 많이 보였다. 주로 일본차가 많이 보였고, 어쩌다가 대우, 현대 등의 우리나라 차도 보였고 러시아차도 있었다. 이번 탐사에서 러시아차인 프르공은 짐을 싣고 다녔는데, 고장 한 번 없이 잘 달린 걸 보면 모양은 그래도 단단한 차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우리가 탄 버스 옆으로 현대 트럭이 지나가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길가에 어린이 놀이터도 보였다. 알록달록한 칠을 해놓아서 이내 눈에 띠었다. 길가에 아파트가 유난히도 많은 지역으로 들어섰는데, 도로사정이 엉망이었다. 쓰레기로 지저분한데다 움푹 파인 곳에는 흙탕물이 고여서 지날 때마다 물이 튀었다.

조금 지나니 포푸라나무 비슷한 활엽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있는 국기 게양대에 몽골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몽골국기는 1992년 2월 12일에 제정되었다. 빨강, 파랑, 빨강으로 구성된 세로 줄무늬 바탕에 깃대 쪽으로 몽골을 상징하는 노란색 문양이 있었다. 그 문양은 소욤보라고 하는데 자유와 독립을 표시한다고 했다. 빨간색은 환희와 승리, 파란색은 충성과 헌신을 말한다고 했다.

꽃이 심어진 아름다운 로터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로터리를 지나 ‘서울의 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내렸다. 근처의 몽골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거라고 했다. 주차문제로 5분쯤 걸어서 가보니 근사한 식당을 예약해 둔 것이었다. 내부의 인테리어도 수준급이고 남자종업원들의 복장도 산뜻했다. 서비스도 좋았고 친절했다. 몽골식 퓨전요리로 오이와 피망 등으로 만든 야채샐러드, 양고기꼬지, 구운 양고기, 소갈비, 감자요리, 당근과 양파 등으로 만든 샐러드, 몽골식 군만두, 볶음밥, 소고기스프 등이 요리로 나왔고, 마시는 것은 징기스칸 보드카, 흑맥주, 등이 나왔다. 술을 못하시는 분들은 주스나 음료수를 청해서 마셨다. 나는 오랜만에 흑맥주를 한 잔 쭉 들이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영진님이 자연스럽게 사회를 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먹고 마시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사회자가 각 테이블마다 장기자랑을 하라고 해서 이화종님의 자작시 낭송, 문순표님의 박사님 흉내, 안채순님의 배 타령, 공송심님과 동남아 아줌마 팀의 한 마디, 나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에 몽골기사님인 바트라 아저씨의 몽골 노래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멀리 떨어져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밤에 외로이 초원을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아저씨는 박수를 제일 많이 받았다. 모두들 서로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며 끝을 냈다. 끝난 시각이 오후 9시 반쯤이었다. 목욕은 물 건너갔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열흘간 목욕을 못했어도 서로 씻지 않아서 그런지 냄새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마친 뒤 탑승구로 들어가서 면세점에서 물건을 살려고 보니 지갑이 안보였다. 버스에 두고 내린 줄 알고 박사님께 얼른 연락을 드렸다. 유로 선생님께 연락하겠노라고 해서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서광원님이 갖고 왔다. 뜬금없이 제 앞에 서더니“스님! 저 아시겠어요?”라고 물어서 얼떨결에 “예”라고 답하니 지갑을 넘겨주시고는 한 마디 했다. “스님! 이런 걸 빠트리고 다니면 안 되지요.”라고.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버스에 두고 내린 줄 알았더니 공항대합실 의자에 떨어져 있더라고 서광원님이 말했다. 찾았다고 얼른 박사님께 연락드렸다. 평소에도 건망증이 심해서 잘 빠트리는데, 몽골에서도 몇 번째였다. 수저집도 흘리고, 모기 물린데 바르는 녹유정도 잃어버리고, 안경도 어디 둔지 몰랐는데 풀밭에 흘린 걸 버스기사님이 주워서 갖다 주었다. 챙긴다고 신경을 썼는데도 어째서 그런지 잘 흘리고 다닌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흘리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몽골 징기스칸 공항은 생각보다 작아서 실망이었는데, 공항면세점도 물건이 조잡스러워서 살 것이 없어 실망이었다. 마두금 연주 CD 두 개만 샀는데 26$ 이라고 했다. 지갑을 찾았으니 카드결재를 할 수 있었다.

오후 11시 50분 출발이지만, 조금 늦게 출발을 했다. 대한항공 868편, 좌석은 58D였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잡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