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차 해외학습탐사 몽골 일지(3일째)

 

2016821일 일요일, 날씨는 대체로 맑았으나 가끔 비가 오락가락함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다. 이경 대원과 문순표 대원은 오늘 식사당번이어서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덕택에 나도 일어나 필기도구를 챙겨 나오니 6시가 넘었다.

이슬이 많이 내렸지만 은박지를 깔고 앉으니 습기가 올라오지 않아 다행이다. 건너편 산이 여명으로 붉게 물들더니 점점 색이 엷어지면서 사방이 훤해지기 시작한다. 드넓은 초원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경이다. 야트막한 산이 삼면으로 들러 쌓여 있고 한쪽은 확 트여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앉아 탐사일지를 써내려갔다.

 

학교 다닐 땐 과학이라는 과목을 싫어했다. 재미없고 딱딱한 과목이라고만 여겼다. 박문호 박사님의 자연과학세상에 나오면서부터 그런 고정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미있을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과학운동은 그래서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런 힘이 있기에 몽골사막으로 탐사하러 오지 않았는가. 일지를 쓰는 동안 건너편 산이 빨갛게 물든다. 해가 올라오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박사님은 역사를 공부 할 때 사람이름부터 외우라고 한다. 이름과 년도, 사건을 연결 지어 외워야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단편적으로 외우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고 전부 잊어버린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고교까지 배운 역사공부가 전부 헛일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폭 넓게 연결고리를 지어가며 익혀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박자세에 들어와서 올바른 역사를 배워 바른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있겠는가. 모르고 사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박자세의 과학운동이 확산되면 될수록 바른 역사관을 갖는 이들이 늘어갈 것이다. 역사를 바르게 알아 간다는 일은 모든 일에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걸 뜻하기에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다.

 

주변은 밝아졌지만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해가 떠오르는 반대편 산은 반사된 빛으로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새아씨 치마폭 같은 빛이랄까. 뜸을 한참 더 들이다가 해가 오를 모양이다.

7시 반에 스프와 삶은 달걀로 간단한 아침을 들고 텐트를 걷으러 갔다. 이미숙, 이순란 대원은 탐사가 처음이지만 익숙한 솜씨로 척척 해낸다. 허리가 시원찮은 나는 그저 옆에서 거드는 시늉만 내었다. 그새 일이 익어 척척 정리하는 걸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님의 아침강의가 840분부터 있었다.

황도(黃道) 라는 개념은 천문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45억 년 전에 동시에 생성된 행성은 태양계를 중심으로 자전운동을 한다.

황도면에 행성이 있는데 ±7° 안에 있다. 태양계의 행성은 태양에서 가까운 곳부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황성 해왕성 등의 순이다.

초기에 태양계가 운동할 때 생긴 각운동량보존법칙에 의해 지구는 영원히 돌아간다. 태양은 하루에 씩 움직여 한 달에 30° 일 년에 365° 돌아간다. 황도면에서 계절의 별자리는 저녁 9시 정남에서 찾을 수 있다.

 

태양계는 45억년에서 39억년 사이에 운석이 출동하는 시기였다. 지구가 생기자마자 지구는 지구의 10분의 1 크기의 운석과 충돌이 있었다. 그로 인해 지구가 23.5°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때 충돌한 파편 중의 하나가 달이 되었다. 달에는 철이 없어 자장(磁場)이 없다. 충돌할 때 철이 지구로 떨어져 운석의 철과 지구의 철이 합쳐지게 되어 태양의 자전축이 되었다. 달은 초기에 지구와 연결되어 있다가 떨어져나가 달의 앞면만 볼 수 있고 뒷면은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인공위성으로 찍어 달 뒷면을 볼 수 있다. 달에 작은 점이 보이는 것은 인간이 달에 착륙했을 때 찍힌 발자국과 탐사용 차의 바퀴자국이다. 달 앞면의 검은 부분은 저지대이고 밝은 부분은 언덕으로 월장석이라 부르는 장석이 많다.

박사님 강의는 여기에서 끝났다.

 

이어서 김현미 이사가 각 조나 소임 담당자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식품담당 노민화 대원은 간식 잘 드세요.” 총무 지승제 대원은 아프신 분은 참지 말고 미리 말씀주세요.” 화장실 텐트담당 김태규(2)대원은 삽으로 흙을 떠서 잘 덮어주세요.” 물 담당 문영창 대원은 물은 큰 병으로 준비했으니 작은 병에 덜어 아껴 드세요.” 라고 말했다.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9시경 출발해서 20분 후에 카라코룸의 호쇼 차이담(Khosho Tsaidam)박물관에 도착했다. 기와로 지붕을 이은 큰 건물로 들어가는 대문도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퀼테긴과 빌케 카간의 비문이 있는 곳으로 비문의 돌과 자재는 당나라가 보내 주어 만들었다한다. 신라의 태종무열왕(603661)비문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문은 굉장히 크고 많이 마모되었으나 글자는 잘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탐사책자 469p484p에 수록되어 있다.

 

오르콘(Orkhon)강 상류에 있는 카라코룸은 흉노, 돌궐, 몽골의 발원지이자 돌궐의 수도였다. 오르콘 비문이라고도 불리는 퀼테긴(Kultegin, 685731)비문은 19세기에 유럽의 탐험가가 발견하였다. 러시아의 바실리 라들로프(18371918)가 학술조사를 할 때 만들어진 비문의 탁본이 가장 좋은 자료가 되었고, 나중에 덴마크의 언어학자 빌헬름 톰슨(18421927)은 이 자료를 써서 먼저 해독했다. 탐사책자 485p495p에 비문을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다. 그 비문에서 튀르크 즉 터키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왔다. 유로 선생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 터키 언어학자들을 이곳에 안내했을 때 비문에서 튀르크라는 문자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나라 때 돌궐인 부민(土門 ?555)은 서위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돌궐을 세워 스스로 아리가 한이라고 불렀다. 돌궐은 수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토문(土門)은 만호후(萬戶侯)를 말하며 게르를 만개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아리가 한은 동생 이스테미에게는 서돌궐(582630), 아들 무한(木汗)에게는 동돌궐(582658)을 통치하게 하였다. 당시 서돌궐은 소그드상인을 통해 비잔틴제국과 교류를 가졌다. 소그드상인 다음으로는 위구르상인을 통했다. 그러나 동돌궐이 먼저 당에 복속되고 서돌궐마저 일부가 복속되어 50 여 년 동안 돌궐의 암흑시기가 계속되었다.

 

쿠틀륵(?691)은 돌궐 독립투쟁의 영웅이 된 돈유쿡과 더불어 680년부터 투쟁을 벌여 제2 돌궐(후돌궐, 683734)을 세워 돌궐조를 부흥시키고 자신은 일테리시 카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외튀켄(Ötüken)산은 둘궐의 성산으로 687년에 도로 찾았다. 후돌궐이 가장 성했던 시기는 제 2대 카파간 카간(?716)이 통치하던 때였다.

쿠틀륵의 사위인 빌케 카간(Bilge Khan, 재위 716734)은 제3대 카간이다. 빌케 카칸의 동생인 퀼테긴은 형을 도와 카스피 해(Caspian Sea)까지 점령해 돌궐을 부흥시켰으나 퀼테긴의 사망 후 급격히 붕괴되었다. 그 후로 투르크족의 서진이 계속되었고 탈라스 전투가 결정적 요인이 되어 투르크족은 이슬람화가 되었다. 744년 제2돌궐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박물관 안에는 금관, 금 세공품(반지, 팔지, 장신구 등), 은 세공품(, 주전자, 사슴 등)등이 있었다.

뼈 무덤은 징으로 쪼아서 만든 네모나고 납작한 큰 돌을 사방으로 하나씩 둘러놓은 사각형 무덤으로 두 개가 놓여있다. 크기가 제법 커서 네모난 돌 크기 하나가 사방 2미터는 넘어보였다. 안에는 뼈가 들어 있으나 무슨 뼈인지 알 수 없었다. 무덤하나는 상상의 새(가릉빈가 혹은 봉황?)가 음각되어 있고, 또 하나는 구름무늬, 꽃무늬(연꽃)가 역시 음각되어 있었다.

 

박물관에는 박물관의 옛 모습을 복원한 모형이 있었다. 사방은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둘렀고 동서남북에 대문이 있다. 대문은 이중문으로 바깥문은 끈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덮개처럼 만들었다. 앞문으로 들어서면 빌케 카칸의 비문이 있다. 아래쪽 밑받침은 거북이 모양의 조각품이고 그 위에 비문이 적힌 돌을 놓았고 비문 위를 돌로 조각해놓았다. 모양이 신라의 태종무열왕비문과 비슷하다. 더 안쪽으로 가면 기와지붕을 한 큰 사각건물이 있는데 이층이다. 이층은 문도 없고 크지 않는 걸 보아 다락방 비슷한 것이 아닌가싶다. 건물 안에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리라. 건물 뒤로 뼈 무덤이 나란히 두 개 놓여있다. 박물관 모형도는 대략 이러했다.

박물관 내부는 생각보다 상당히 커 이리저리 둘러볼 것이 많았다.

10시 반경에 박물관을 출발했다. 버스에서 간식을 나누어주었다. 건과와 에너지 바, 삶은 계란이었다. 배가 출출한 터라 맛있게 먹었다.

 

1120분에 에르덴 죠 사원(Erdene zuu Khiid)에 도착했다. 몽골 최초의 사원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박물관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1578년에 소남가초(15431588)는 알탄 칸으로부터 달라이라마 칭호를 받았다. 에르덴 죠 사원은 1586년 알탄 칸이 궁궐터에 사원을 짓도록 해서 달라이라마 3세가 된 소남가초가 불상을 하사받아 지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100개의 사원, 300개의 게르, 1000여명의 승려가 살았던 큰 사원이었다. 그 후에 두 번 불이 나서 다시 복원하였으나, 1937년 구소련의 스탈린 정부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었다. 몇 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사원은 사방이 담장으로 되어있고 담장과 담장 사이에 탑이 있다. 탑은 전부 108개로 백팔번뇌를 상징한다. 제일 큰 탑은 알탄스투파로 1799년 제 4대 젭춘담바 쿠툭트(라마교의 수장)25번째 생일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안에 들어가면 기와지붕을 이은 큰 건물 세 개가 나온다. 가운데 건물은 사원에서 제일 큰 이층 건물로 달라이라마 숨이라고 한다. (Sum)은 사원이라는 뜻이다. 기와지붕 꼭대기에는 오방으로 금강저가 있다. 내부의 가운데 천정은 높고 양쪽은 조금 낮다. 천정을 전부 비단 천으로 장식해놓아 특이하다. 양쪽 기둥에는 황룡이 길게 조각되어 있고 금색과 노란색으로 칠해 놓았다. 또한 양쪽에 서있는 무서운 형상의 인왕상은 머리에 해골을 이고 있고 그 위에 금강저를 올려놓았다.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세 건물 중에 오른쪽 건물은 바닥이 직사각형벽돌로 깔았고 천정에는 꽃무늬 천정화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황모파 승려들의 의식을 그렸고 왼쪽 벽은 큰 불상을 중심으로 작은 불상을 꽉 채운 그림이다.

왼쪽 건물에는 비단 옷을 입은 삼존불이 모셔져있다. 가운데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이다.

따로 떨어진 곳에 건물 두 채가 있다. 오른쪽 건물에는 천상세계를 그린 벽화가 있고 자나바자르의 모습을 천으로 붙여 만든 만다라도 있다. 왼쪽 건물에는 지옥세계를 그린 벽화가 있어 대조적이다.

 

제일 끝에 있는 흰색 건물은 라브린 숨(Lavrin Sum)으로 실제로 법회를 여는 장소이다. 마침 사원에 큰 행사가 있는지 염불소리와 함께 바라와 나팔소리가 들렸다. 하도 시끌벅적하게 크게 들려 들어가 보니 양쪽 입구에서 기도접수를 하고 있다. 신도들은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많고 옷은 몽골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아마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왔는지 비단으로 만든 옷들이 화려하다. 연세가 든 분들도 화장을 곱게 한 것으로 보아 한껏 멋을 내고 사원으로 기도를 드리러 온 것 같다. 20여명의 라마 승려들은 두 줄로 마주앉아 독경을 하며 바라를 치는 스님도 있고 소라나팔을 부는 스님도 있다. 뒤에는 어린 승려 둘이 앉아 경전을 펼치고 독경을 하며 들어온 사람들을 힐금힐금 쳐다본다. 제일 앞에 앉아 독경하는 스님은 요령과 금강저를 번갈아 들어가며 손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수인(手印)을 만들어가며 독경을 이어간다. 향을 얼마나 많이 피워놓았는지 눈이 매울 정도였다.

불전에는 버터로 만든 꽃모양의 만다라가 죽 이어서 장식되어 있고 그 앞에는 기름, , 곡물, 떡 등을 작은 종지에 담아 많이 올려놓았다.

법당 천정에는 오색비단을 드리웠으며 오색실도 드리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오방색이라고 해서 오색 천과 오색실을 드리우는데 라마불교의 의식과 닮은 점이 있어 신기했다.

 

사원 입구 쪽으로 나오니 윤장이 설치되어 있어 대원들이 한 번씩 돌리면서 지나갔다. 사원 입구로 나가는 곳에 게르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어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호기심이 일어나서다. 몽골도 이런 게 생기는 걸 보니 커피를 마시는 인구가 늘어나는가보다.

당시에 티베트불교가 몽골에서 왕성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더 이상 넘어오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한반도가 이슬람화가 되지 않았다고 박사님이 말해주었다.

 

에르덴 죠 사원을 나서니 오후 1시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30분 달려 몽골식당에 닿았다. 오랜만의 외식에 대원들 모두가 기대에 차있다. 몽골 전통음식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식당이 크지 않아 탐사일행이 들어가니 비좁아서 빼꼭하게 끼어 앉았다. 먼저 몽골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수태차가 나왔다. 나는 좋아하는 편이라 석 잔이나 마셨다. 어느 대원 왈 꼭 사골국물 맛 같네요.”라고 표현했다. 우유, 버터, 치즈, 곡물가루, , 소금이 들어갔으니 그런 맛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이상한 맛이라더니. 마셔보니 좀 괜찮은지 나중엔 너도 나도 더 달라고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음식은 소고기가 든 몽골식 튀김 만두, 소고기 칼국수, 볶음 국수, 말고기볶음이 차례로 나왔다. 말고기는 조금 짜서 많이 남았다. 남은 말고기는 가지고 와서 저녁에 야채를 넣어 다시 볶아먹었다.

 

오후 2시 반에 버스에 올라 카라발가순(Kharabalgasun)으로 이동했다. 주유소가 멀어 스타렉스에 기름을 넣느라고 20여분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했다.

325분에 위구르 유적지에 도착했다. 위구르(744840)의 수도로 성이 있던 곳이다. 위구르는 수레바퀴라는 뜻이다. 철륵은 돌궐 이외의 트루크계를 말하며 위구르도 그 중에 하나이다. 위구르는 744년에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위구르제국을 세웠으나 840년에 키르키즈에 의해 망했다. 키르키즈족은 러시아의 예니세이(Enisei, Енисей)강 주변에 살던 민족으로 나중에 키르키즈스탄이 되었다.

 

위구르성은 토성으로 사방을 흙과 돌로 성벽을 쌓아올린 곳이다. 성이 있었던 자리는 무너져 성 한쪽에 높게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확 트인 넓은 곳으로 성이 있던 자리는 풀이 무성하다. 성벽 입구에 들어서니 발굴하는 사람들 10 여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흙을 파내어 한쪽에 쌓아놓은 것이 보인다. 흙더미로 보아 꽤 오랫동안 작업을 한 듯싶다. 어떤 유물들이 나왔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굴을 할지 모르겠다.

 

텅 빈 성터에 바람만 쓸고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흥망성쇠가 한 순간에 지나가버린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 옛날 카라발가순의 위구르 성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한 때는 번영을 누렸겠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성벽 위에는 염소나 양, 소나 말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그들이 버리고 간 배설물이 그것을 말해준다. 성 저편에는 성이 무너진 자리가 남아 흙더미가 쌓여 봉수대처럼 높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람도 불고 비도 오는 궂은 날씨여서 나는 도중에 성벽에 앉아 쉬었다. 허리통증이 시작되어서다.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성벽위로 줄지어서 가는 모습이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 같다. 박사님을 비롯해 몇 분은 벌써 성위에 올라가 서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싶다. 김현미 이사는 성 아래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긴 듯하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 은사스님이 좋아하는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주노라

달밤에 오면 노래에 나오는 장면이 연상될 것만 같다.

 

역사상 천년을 버틴 나라는 드물다. 백년도 못 넘기는 가하면 기껏해야 오백년이다. 신라(BC 52AD 935)의 서라벌이 992년간 수도였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년의 역사를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위구르 성을 내려오며 온갖 상념에 사로잡힌다. 지금은 양과 염소 등 가축들이 성 아래서 풀을 뜯다가 심심하면 성벽으로 올라와 볼일을 보고 가는 쉼터가 되어버린 곳, 위구르 성이여!

 

위구르제국은 트루크계로 위구르문자가 있어 행정과 정치에 능했다. 위구르상인에 의한 통상무역이 발달해 당나라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당 현종 재위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났을 때도 위구르가 구원병을 보내 대란이 종결되었다. 나중에 천산위구르와 화서위구르는 칭기즈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몽골제국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현재 위구르족은 중국 신장위구르 이외에 터키에도 30만 명이 사는 등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다섯 시 반쯤 카라발가순을 뒤로 하고 아르항가이(Arhangai)로 향했다. 8시쯤 아르항가이아이막의 주도인 체체르렉(Tsetserleg)시에 도착해 마트에서 시장을 보았다. 체체르렉은 몽골 제 2의 도시답게 큰 건물은 있으나 아직은 시골스러웠다. 몇 년 전 이곳에 들렀을 때의 풍경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수도 울란바타르는 놀랄 정도로 급성장한 모습이 눈에 역역하게 보였건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도로만 인구가 집중되어서 일게다.

 

숙영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가 넘어서였다. 체체를렉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주위에 게르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축의 배설물은 다른 곳보다 많아 삽으로 치우고 나서 텐트를 쳤다. 풀이 길게 자라고 바닥은 고르지 않아 잠자리가 불편할 듯하다. 저녁 10시 경에 저녁을 먹었다. 햇반과 미역국, 반찬은 멸치볶음, 낙지젓갈, 오이지 등 세 가지와 김치가 나왔다.

 

저녁에는 특별 강의가 있었다. 11시 경 부터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로 가천의대 석좌교수이며 뇌 과학 연구소장으로 계시는 조장희 박사가 먼저 나와서 강의했다.

20세기는 뇌 과학의 장을 열었다. 1972년의 CT촬영을 시작으로 산 사람의 뇌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1973년에는 UCLA에서 CT심포지엄을 열어 뇌 과학 연구가 체계적으로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전자의 세계로 양전자가 방출되고 있다.

CT(computerzed tomography)CT스캐너를 사용한 컴퓨터 단층촬영법으로 X선이나 초음파를 여러 각도에서 인체에 투영하고 이를 컴퓨터로 재구성해 인체내부의 단면모습을 화상으로 처리하여 종양 등의 진단법에 널리 쓰인다. 재료를 파괴하지 않고 안전하게 촬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내부의 모습, 빈 공간, 밀도를 알기 위해서도 이용되고 있다.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는 양전자를 방출하는 방사선의약품을 이용하여 인체에 대한 생리 화학적, 기능적 영상을 3차원으로 얻는 핵의학 영상법이다. CT보다 기능이 훨씬 뛰어나다.

앞으로 과학기술의 선도만이 우리의 경제를 살릴 길이다. 정부가 과학자들에게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만 뛰어난 과학자들이 나올 것이다.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우리가 인류에게 무엇을 공헌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살자는 말을 숙제로 남기고 강의를 끝냈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다음은 서강대학 철학과 교수 최진석 박사님의 강의이다. 그는 디지털시대를 선도하기 위한 인문-과학-예술 혁신 프로그램으로 반역자를 기른다.”는 건명원(建明苑) 원장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해학적인 인사말을 한다. “파파로티가 오페라를 부르고 난 뒤 동네 아저씨가 노래 부르러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조장희 박사 다음으로 나온 것에 대한 말이다.

세상은 인간세상과 자연세상으로 나뉜다. 자연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는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한다.

먼저 이()의 뜻은 좁은 의미로는 사물의 원리 내지 법칙이며, 넓은 의미로는 우주의 본체를 말한다.

다음 인문(人文)의 뜻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철학은 이 범주에 속한다.

 

장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나라는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은 잘한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차의 모양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왜 그럴까. 멋있어 보여서다. 인간의 욕망의 변화에 의해 디자인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변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읽혀진다. 선진국이 되려면 선도력(先導力)이 있어야하는데 철학적인 사유가 힘을 형성한다. 철학은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여 철학적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장르다.

장르에 대한 선진국과 후진국의 다른 점은 이러하다.

선진국이 장르를 포착하면 후진국은 구체화한다.

선진국이 장르를 만들면 후진국은 채워준다.

선진국이 장르를 행사하면 후진국은 따라간다.

장르는 상상, 창의, 창조에 의해 컨셉을 포착하는 것이다.

선진국이 되려면 지성적 움직임이 탁월해져야한다. 미치지 않고는 탁월해 질 수도 없고 최고에 도달할 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선진국이 되려면 미쳐야하지 않겠는가.

자기만의 별을 찾아가는 것! 자기 자신이 별이 되자.” 라고 끝맺음을 했다.


강의를 듣고 나오니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머리 위에 북두칠성이 떠있다. 달빛도 밝고 별도 밝다. 별을 더 보려했으나 잠이 쏟아져 텐트로 빨리 들어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