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행을 가기 위해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절문을 나선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다리건너편에 있는 재매정財買井길로 들어간다. 여기는 몇 년 전에 만들어 놓은 둑길이 따로 있다. 문천蚊川에서 내려오는 물을 거슬러 둑길을 따라간다. 일본의 옛 시인이 “아무리 아쉬워도 잡을 수 없는 것은 해와 달과 흐르는 물과 나이”라고 읊은 시가 떠오른다. 지나가며 늘 보는 강물이건만 이런 평범한 진리가 그 속에 있다는 걸 이제야 문득 깨닫는다.

우물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집터인 재매정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에 나가기 전 집에서 길어온 우물 맛만 보고 ‘우리 집 물맛은 변함이 없구나.’라며 내쳐 말을 내달렸던 장군의 이런 충정이 있었기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걸어가면 사마소司馬所가 보인다.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이 토론하던 곳이다. 영조 때, 경주부윤 홍영한洪永漢이 현판을 쓴 이 건물은 본래 월정교月淨橋근처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런데도 예부터 있었던 곳인 양 자리 잡고 있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사마소를 뒤로 하고 길을 건너면 교촌한옥마을이 나온다. 다른 것보다 우리의 전통인 누비한복이 전시되어 있어 한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누비옷은 한 땀 한 땀 손으로 바느질하는 인고의 완성물이다. 뭐든 쉽고 빠른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꼭 몸에 부쳐야 할 덕목의 하나가 아닐까. 

이내 요석궁瑤石宮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한식 요리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그 옛날 요석공주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앞으로 아직도 공사 중인 월정교가 문천 위에 걸려있다. 다리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마냥 서서 완성된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요석궁을 돌아서면 향교鄕校가 보인다. 현재는 전통혼례도 치르고 옛 문화를 알리는 아카데미도 설치되어 이용하는 이가 꽤 많은 것 같다. 이전에는 여름방학마다 큰 대청마루가 있는 시원한 누각에서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어느 해 여름, 한 달 동안 소학을 익혀 성균관 졸업장을 받은 적이 있어 정겨운 느낌이 드는 장소이다. 

향교 옆의 계림鷄林은 서라벌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다. 전해져 오는 설화에 의하면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금궤 속에서 발견된 곳이라 한다.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울창하던 숲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고사한 나무가 눈에 더러 띠어 측은한 마음이 든다. 빈자리에 새로 심어놓은 나무들아 어서 빨리 쑥쑥 자라라!

계림에서 품어 나오는 산소를 마시며 반월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동궁입구에는 왕성이 들어섰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잡풀만 무성하다. 그야말로 ‘황성옛터’라는 노래 가락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반월성에 대한 이런 느낌을 표현한 시로는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의 회고시懷古詩가 남아 있다. 

 

반월성에서

반월성 옛터 위에 해는 이미 저물어 멀리 노는 나그네는 마음 더욱 쓸쓸해라!

푸른 기운 양산부리에 풍연風煙도 늙어가고 누른 잎 계림 숲에 세월은 흐르누나!

명활촌明活村 남쪽에는 구름만 아득한데 황룡사 북쪽에는 가을 풀만 더꺼처라!

가여울 손 그 옛날에 관현악 울리든 곳 어떻다 들 늙은이 벼 밭이 되단 말가!


월성의 능선을 오르내리면 큰 돌부리가 가끔 발에 차인다. 신라 파사왕破娑王때 축조된 성으로 그 당시 사용했던 돌들이 천년이 넘도록 성벽을 지켜오다가 나의 발하고 맞닿은 것이다. 불가에선 옷자락만 스쳐도 오백생 인연이라 말한다. 정말로 기막힌 우연이 아니겠는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높은 곳에 올라서니 월정교가 세로로 걸쳐있는 게 보인다. 찻길에서 보면 가로로 누운 형상이다. 장소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보이니 참으로 신기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낮과 밤에 비치는 물속의 그림자도 다르다. 낮에는 해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그림자를 드리우나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반면 밤에는 조명을 받아 오색단청이 물속에 환히 드러나 있어 그 화려함은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나의 월정교가 물속에서 일렁거리며 떠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라면 낮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꾸밈이 없는 자태라고 할까. 사람으로 치면 화장을 안 한 민낯을 보는 거와 같아 수수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능선을 계속 걸으며 건너편에 있는 박물관 지붕을 바라본다. 한옥의 처마 끝을 살린 지붕이 하늘을 향해 곧 날아오를 것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어 현대식 건물이지만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다. 걸어가는 곳곳에 나무 그루터기가 자주 눈에 띤다. 외래수종인 나무들을 베어낸 자국들이다. 성 곳곳에 심었던 대나무 숲들도 거의 다 베어낸 것 같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처럼 뒤엉켜있던 대숲들이 차례로 없어지니 동궁 뜰이 훨씬 깔끔해진 느낌이 든다.

남천을 끼고 축조된 월성은 한 면이 자연적인 해자垓字라 걷는 내내 성 아래로 물이 보인다. 자연환경을 이용한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지혜에 다시금 놀랄 뿐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성들을 돌아보면 일부러 해자를 파서 인공적으로 둘러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16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천여 년 전에 벌써 그런 머리를 썼다는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다.

아직도 능선이 이어진다. 길 건너에 있는 월지月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강점기 때는 안압지雁鴨池로 불리어졌으나 지금은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예전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단장을 해서 밤이면 조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월지를 지나면 능선도 내리막길이 되어 평지로 이어진다. 천천히 걸으며 샛길로 접어든다. 그 길 안쪽에 탈해 왕을 모셨던 숭모전 자리에 있는 옛 우물을 보기 위해서다. 우물 위로는 조각된 돌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데 쌓아올린 우물의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엔 많은 이들이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옛날엔 성안의 우물물이 제일 깨끗해 병을 낫게 하는 청정수 역할도 하였다하니 당시에는 귀한 대접을 받은 우물이었을 것이다.

넓은 길로 되돌아 나와 석빙고石氷庫가 있는 곳에 다다른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기웃거리며 서있다. 자물쇠로 채워놓았으니 안쪽이 궁금했나보다. 지금에야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어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리라. 월성을 거의 한 바퀴 돌자 처음에 들어왔던 길이 다시 나온다. 올 때와는 달리 갈 때에는 걸음이 조금 느려진다. 평지로 들어서니 긴장이 풀어져 자연히 그렇게 되는 듯하다. 절까지 가면 거의 한 시간 반이 걸리는 포행길이다.

천년고도였던 서라벌에 사는 것만으로도 행운이거늘 역사적인 유적지가 우리 절 근처에 있어 포행을 돌 수 있다는 것은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역사는 과거를 알려주어 현재를 충실하게 하고 나아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니까. 

포행에서 돌아와 마루에서 운동화 끈을 푼다. 다음날을 위해 신발장에 넣어둔다. 걷고 또 걷노라면 목적지인 피안彼岸에 다다르리라는 희망을 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