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같던 눈송이가 어느새 뚱뚱해지더니 무겁게 땅을 누른다. 버둥거리는 눈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희롱하는 순간 앞 건물이 흐릿하다. 눈 그림자 어디로 갔나 보이지 않고 눈송이끼리 서로 반겨 빛나고 있다.


작년에 올라가서 보았던 뒷산 도토리나무를 찾아본다. 일곱 채의 까치집이 재개발 되었나 한 채만 알박이 하는 것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다. 뒷산 아래 동네에 집 몇 채에는 붉은 깃발 사이로 서민 죽이는 재개발 절대 금지검은 글씨가 눈발을 맞으며 펄럭 거린다.


학교 사육사가 뒷산에 기른다던 토끼는 눈 잘 피하고 있으려나, 꼬부랑글씨로 분양 합니다써진 종이 상자에서 고개 내밀고 있던 햄스터는 좋은 주인 만났겠지. 첫눈 오면 만나자 했던 그 사람은 잘 살고 있나. 그 때 함께 봤던 눈은 그 사람에게도 내리고 있을까. 멍하니 내리는 눈 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집에 갈 일이 큰일이다.


눈앞이 찌뿌둥하여 안경다리를 들어 본다. 안경알이 뿌옇다. 눈 보다가 눈 앞 흐린 것도 못보고 있다. 태어나 처음 쓴 안경, 앞이 잘 안보여 안과를 갔더니 노안입니다.’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맞춘 안경이다. 이것도 적응이라면 적응인가 싶게 일어나면 먼저 안경다리를 집어 든다. 눈보다 손이 먼저 눈을 챙긴다. 처음 안경 쓸 때는 안경테가 세상을 사각의 틀에 집어넣는 듯 했다. 며칠 전에는 자다 일어나 눈이 간지러워 눈을 비비려고 보니 안경알이 손을 막는다. 안경이 이미 내 몸 되어 있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쓸쓸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안경을 닦고 밖을 보니 눈 알갱이는 더 줄어들어 틈 하나도 허락하지 않고 내리고 있다. 위에서 오는 눈이 아래에 있는 눈을 덮고 있다. 한 참 뛰놀던 바람은 뒷산에 앉아 쉬러 갔나보다. 눈이 내린 계단을 팔이 불편한 뇌성마비 직원이 쓸고 있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 다니며 눈을 뭉치며 놀고 있다. 한 아이가 뭉친 눈덩어리를 친구에게 던진다. 눈뭉치가 모자 쓴 아이 머리에서 불꽃처럼 터지고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귀에 주워 담고 싶은 웃음이겠지만 닫친 창문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직원 한 명이 아버지께서 부르셔~~~’ 동요를 부르며 핸드폰을 내게 내민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어제 퇴원하셨다던 아버지 전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이 앞선다. 어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담즙을 담는 주머니와 연결된 호스를 잘못 건드렸다며 전화를 급히 끊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 하셨다고 한다. 괜히 걱정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목소리의 대부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소리가 희미하다. 온 동네 울리던 목소리는 어디에 두고 다니시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아버지 목소리를 담던 내 귀는 덜 채워진 소리 크기를 가슴에서 찾고 있다. 집에 돌아오지 않던 나를 찾던 아버지가 소리 쳤던 그 소리가 나를 찾아온다. 미안하다는 말이 더 소리가 크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아버지 병실에서 맡았던 냄새가 느껴진다. 아버지는 좋은 소식만 전해주라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으셨다.


펑펑 내리는 눈이 소리를 잡아먹고 있다. 잡아먹힌 소리는 눈과 함께 땅으로 스며든다. 스며든 소리는 새싹으로 피어나 한 시절 살다 가겠지. 그리워하면 꽃이 된다고 했으니 이 세상 많은 꽃은 누구의 속삭임인가. 그래서 선배는 이제는 내 안에 꿈보다 꽃 속의 바람이 더 예쁘다.’고 메시지를 보냈나보다. 참 많이도 눈이 내린다. 올 해는 꽃이 많이 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