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꽃


때로는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이라는 학습단체에서 몽골을 갔을 때 일이다. 화산지역을 탐사한다고 해서 시커먼 돌과 재가 흐트러져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으나 예상을 뒤집는다. 화산 입구에서부터 눈이 커다래졌다.


야생화가 무리지어 꽃밭 천국을 이루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패랭이, 구절초, 솜다리, 용담 등 눈에 익은 꽃들을 보니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좀처럼 작아지지 않는다.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몽골사막의 끝자락에서 이런 진풍경을 보게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다. 분화구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도 야생화가 지천이다. 모르긴 해도 화산재가 거름이 되어 꽃들이 더 잘 자라는 성싶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 틈새에 끼인 다육이가 나를 보아달라는 듯이 움츠린 고개를 내밀고 빤히 쳐다본다. 너도 거기 있었구나하며 눈길을 맞추고 일어서자, 주변에 있는 돌들이 꼬까옷을 입은 게 보인다. 은화隱花식물인 돌 꽃이다. 바위 옷, 돌 옷, 바위 꽃 등으로도 불리나 학술용어로는 지의류地衣類라고 한다. 하긴 땅 위에 있는 돌에서 피어나긴 하지만 ‘땅 옷 종류’라고 부르다니, 돌 꽃이 들으면 아주 섭섭할 것만 같다.


돌 꽃은 돌에 낀 이끼와는 다르다. 선태류蘚苔類인 이끼는 물기가 없으면 이내 말라버리지만, 지의류는 균류菌類와 조류藻類가 공생하며 살기 때문에 악조건이라도 잘 죽지 않는다. 돌 꽃의 색깔은 여러 가지다. 노랑, 빨강, 파랑, 하양, 주황, 초록 등의 꽃을 돌 위에다 피운다. 생명이 없는 돌이라고 여겼건만…. 이보다 더 경이로운 일이 있을까. 그저 멍할 따름이다. 감정이 무디고 무뚝뚝한 이를 ‘목석같다’고 표현하지만, 우리와 똑같이 숨 쉬고 있는 돌을 보며 신비로움을 느낀다.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돌과의 대화』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돌은 자신에 대해 ‘∼편하기로 말하면 엎어놓은 그릇과 같으니 진실로 뿌리가 있어 심어진 것처럼 안정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에 비해 사람에 대해서는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면서도∼본래의 참된 것을 잃고, 또 지조가 없는 것은 그대뿐이로다. 만물의 영장이 바로 이런 것인가.’라고 말한다. 얼마나 기가 막힌 비유인가. 글을 읽어보니 꼭 나를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아 돌한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을 어찌 무생물이라 하겠는가. 부처님은 ‘기는 벌레, 서있는 바위도 다 함께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어느 것 하나 내 몸과 같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으로, 유정(有情-마음을 가진 살아있는 중생)이나 무정(無情-감정이나 의식이 없는 것)이나 다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는 자비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옛 스님들은 산길을 다닐 때 눈에 안 보이는 벌레나 풀이 다칠까봐 땅을 살살 디디고 다녔다고 한다.


돌 속에 꽃이 핀 것도 있다. 수석壽石 중의 하나로 문양석紋樣石이라고 부르는 종류다. 주로 국화, 장미, 매화, 해바라기 등의 무늬가 많다. 지의류는 돌의 겉에 피어있어 예쁜 꽃무늬가 있는 포장지로 감싸놓은 것 같은데 비해, 문양석은 꽃이 돌 속에 피어있어 꽃무늬를 새겨 놓은 듯하다. 둘 다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스레 피워 낸 꽃이라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에서 피어나는 꽃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사이에 걸쳐있는 데스 벨리(Death Belly)라는 사막에서 다시 한 번 놀란다. 아티스트 팔레트(Artist Palette)라는 돌산을 보았을 때이다. 파스텔 톤으로 그린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곳으로 각기 다른 색들이 모자이크처럼 되어 있어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걸작이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오억 년 전에 생성된 데스 벨리는 여러 번의 지각변동을 거쳐 구천년 전부터 오천년 사이에 지금의 사막으로 바뀌었다. 사막에는 폭우가 내리면 나무가 없는 산은 흙이 무너져 내려 바윗돌이 드러나게 된다. ‘아티스트 팔레트’는 돌이 갖고 있는 금속성분이 밖으로 드러나 여러 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곳이다. 화가가 팔레트에서 물감을 발라놓아 예술작품을 만든 것 같이 보여 ‘아티스트 팔레트’라는 이름이 부쳐진 성싶다. 어찌 보면 갖가지 색깔의 꽃무더기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의 생명력은 ‘데스 벨리’ 즉 죽음의 골짜기라는 지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장면을 연출해 낸 것이다.


바윗돌은 꼼짝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뿐만 아니라 척박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저마다의 꽃을 피워낸다. 어찌 사람이 돌보다 낫다고 우쭐댈 수 있을쏜가. 보다 나은 환경조건 속에 살면서 불평불만만 쏟아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돌을 보며 꿋꿋하게 나만의 꽃을 피워야겠다고 다짐한다. 말없이 가르침을 주는 돌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절구통 수좌라는 말이 있다. 바윗돌처럼 몇 시간이나 미동도 하지 않고 좌선을 하는 수행승을 일컫는 말이다. 말없이 조용하게 앉아 참선에 매진한 적이 있는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았다. 솔직히 말해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느라고 수행자다운 수행을 한 적이 없으니 부끄러운 중노릇을 한 셈이다. 돌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도 않건만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돌에게서 무언의 가르침을 듣는다. 돌은 무생물이 아니라 분명히 살아있다. 움직이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지만, 꽃으로, 빛깔로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돌부처가 말이 없어도 많은 가르침을 들려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