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강의의 주요 내용은 황도에 관한 것이었다. 태양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 1도 정도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그럼 황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태양이 뜰 때 있는 별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저녁 9시 정남쪽에 있는 7~8월의 별자리는 궁수자리와 전갈자리이다.


박문호 박사는 이어 달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곰보같은 달의 상채기는 수 천, 수 만 년이 지나도 변함없다. 어디 그뿐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안착했을 때의 우주선 모양이 풀빵 찍힌 것처럼 그대로 나타나 있다. 우리 사람 사는 곳은 먼지가 더께로 앉게 되면 흔적이 지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달은 그렇지 않다. 우주먼지가 있어도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지 말자. 어쨌든 우리 인류가 달의 뒷면을 보게 된 것은 인공위성의 출현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45억 년 전 운석이 충돌을 일으켰을 때 달에 있던 철 성분이 모두 지구에 보내졌기 때문에 달에는 자장이 없다.


짧은 강의를 마친 후에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오르콘 돌궐 비문을 보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유로씨가 돌궐의 비문이 보관된 이 박물관을 알게 된 것은 터어키에서 온 언어학자를 안내를 하다가 찾은 곳이라 했다. 이 곳을 방문한 학자들은 비석에 써진 문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우리에게 전했다.


박물관의 전시장에는 학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고대 투르크 문자로 새겨진 비문들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러시아인 야드린체프가 오르콘 강가에서 미지의 문자로 새겨진 두 개의 비문을 발견하여 서구 학계에 소개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덴마크의 빌헬름 톰센의 역할이 컸다. 소수의 모음과 30개 이상의 자음을 나타내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고대 투르크 문자라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돌궐의 군주인 빌게 카간이 732년에 사망한 동생 퀼 테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내부에 진열되어 있었다. 두 개의 비석은 웅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쪽 면에는 한문이 새겨져 있었고 나머지 면은 모두 고대 투르크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박문호 박사는 당나라와 돌궐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느라 열변을 토했다.

제 1돌궐을 세운 사람은 토문이란 대장장이였다. 유연이 침략을 받게 되자 돌궐의 부족들이 그를 도와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러나 토문은 유연의 아나게와 혼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반대에 부딪힌다. 몹시 마음이 상한 토문은 돌아서서, 서위 중국 공주와 결혼하여 세력을 키운다. 그리하여 유연을 공격하게 되고 토문은 아들인 무칸에게 동돌궐을, 동생인 이스테미에게 서돌궐을 물려준다. 그러나 630년 당에게 망하게 되자 제 2의 돌궐을 680년 일테리쉬가 다시 부흥시키는 데 이때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명재상 톤육쿠이다. 그는 동과 서에 다 살아봐서 누구보다도 실상을 잘 파악했다. 일테리쉬 칸의 두 아들 중에 형인 빌케 칸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퀼 테긴은 전장에 나간다.


카라코롬에 절과 모스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톤육쿠였다. 그 이유인즉 유목민은 종교에 심취하면 무력이 쇠해진다는 것이었다. 타당한 말이었다. 또한 돌궐은 내몽골에 남아 있던 돌궐인들의 반환, 물자의 공급, 공주와의 혼인을 당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측천무후도 이를 거부할 수 없어 경작에 필요한 종자 4만여 석, 농기구 3000종, 기타 작물 5단을 주는 동시에 회양왕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박문호 박사의 역사 이야기는 어릴 적 할머니한테 들은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가 있다. 측천무후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왜냐면 측천무후는 자신이 왕좌에 앉기 위해 남편은 물론 자식까지 죽인 포악한 여황제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동서양의 정세와 맞물려 설명해 줘서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나라 태종무열왕의 비석이 돌궐에서 가져 온 돌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왠지 우리 조상땅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낮은 담장 너머를 휘돌아보니 군데군데 게르가 눈에 띈다.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기 위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운전기사들이 바닥에 누워 차의 내부를 손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여러 가지 공구들이 펼쳐져 있었다. 박문호 박사는 그 시간도 아까운 모양이다. 잠시도 쉼 없이 책자를 펼쳐들고 돌궐의 비문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돌궐 비문에 반복적으로 쓰여진 단어의 의미를 적어보자.


보둔 - 백성

테릿 - 끌어모은다

벡 아마르 타이싀 - 장군

발발 - 돌비석


‘바퀴’라는 의미의 위그르. 그 성터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도중에 야트막한 개울물을 몇 차례 만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평원에는 소와 양,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위그르는 머리에 황금을 이고 가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전세계 통상무역로를 열어준 위그르는 물물교환의 소그드 상인 왕래가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위그르 성터에 도착하자 몇 방울의 비가 흩뿌렸지만 맞을 만했다. 돌무지와 잡풀로 우거진 꼭대기를 향해 걸어갔다.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바람이 보였다. 풀이 눕는 방향. ‘광활한 초원’이란 상투적인 표현밖에 쓸 수 없는 게 참 난감하다. 딱히 뭐라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곳이 바로 위그르 성터였다. 백년 동안의 역사를 지닌 유목국가 위그르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 바람에 너풀거린 우보의 울긋불긋한 헝겊이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