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가 내린 후 흐린 날이다.

이런 날은 마음 깊이 질러 놓은 빗장이 풀리며 스물 스물 감정이 밀려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이 병원에 온지도 팔 년 채니까 곧 십년이 되어간다.

인생에서 십년 단위는 큰 마디일 수밖에 없다.

삼년만 있으려 했었지..그 날 입원실에서 들리는 울부짖는 환자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제인 에어의 로체스타 저택을 떠 올렸고 과연 내과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환자는 처방된 약을 먹기는 할 건가,환자와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건가 복잡한 생각들이 교차 했었다.

수련 생활 시작 할 때 정신과 레지던트를 제안 받았는데 외로운 섬 같은 소통 부재의 환자들을 보며 나는 할 수 없다고 .. 그런데 만년에 다시 받게 된 제안이 정신질환자의 내과적 질병을 보는 것.

 

사십여 년, 이 긴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초기에 거절했던 환자들을 만년에 보살피게 된 건 행운일까

정신이 망가지고 덧 붙여 심한 신체 질환을 겸비한 토탈 환자들

대부분이 가족과 사회에서 버려진 환자, 빈곤과 피폐함으로

극단의 상황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야하는 환자

극단, 바닥에서 더 이상 추락 할 곳은 죽음밖에 없는 한계 상황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본다, 단지 지켜 볼 수밖에...

효용성이 없는 인간, 주변에 짐이 되는 가치라고는 없는 인간, 그래서 버려진 인간을 본다. 인간이 인간을 버리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본다.

끝까지 망가져가면서도 가족과 온기를 목말라하는 기다림을 본다.

마지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어도 손을 잡지 않는 냉담함을 본다.

그리고 나의 손을 본다. 놓아버리는 게 모두를 위해 나은 게 아닐까 갈등하는 나의 손을..의사의 사명은 생명을 돌보는 것이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란 얼마나 상대적인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을 걸며 ..

이성적 생각들은 얼마나 차가운 가

관점, 파생되어 나온 허망한 가치들..

차가움은 생명에는 얼마나 독이 되는 가

환자들을 자세히 보면 보이는 게 많다.

오늘 회진 때는 갑동이가 눈에 띤다. 소개하자면 이 환자는 43세 나이지만 3-4세 어린 아이시다.

매일 요구 사항은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펼치는 딸기 요구르트 다섯 개, 죽 다섯 개다. 요구를 안 들어 주거나 싫은 일은  특히 관장을 해서 대변을 보게 하는 일은 엄청 싫어해서 병실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고 떼쓰는 게 못 말리는 정신 발육 지체에 갑상선 기능 저하증 환자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돌보는 모두가 갑동이 갑질에 못 살겠다고 분개하는 상황인데 라운딩하면서 보니 오늘은 양 무릎을 꿇고 단정히 티비 앞에 앉자 있더군요. 마치 명륜당 서생 같은 모습으로,

뭐하는 건가 물었더니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댄 후 다시 티 비 인물을 가리키는 거였다. 출연자는 마지막 황손 이 석씨가 한 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으시고 나오셨더군요. 그 분을 향해 갑동이는 반듯한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건함 속에서 행해지는 갑동이의 쎄레머니에서 아버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슬픔과 그리움을 본다.

히스토리를 보면 갑동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집에서 극진한 돌봄을 받았고 그래서 응석받이가 된 모양이다. 아버지 사후 형제들이 돌보다 힘겨워 입원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갑동이는 떼 부리는 일이 없을 때는 책을 들여다 보며 휄체어에 종종 앉아 있다. 독서하는 소년처럼 조용하고 진지하게...

그의 아버지가 해 주었던 일 중에 하나였었나, 지적장애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자 노력했던걸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헌신과 사랑, 그 고단했슴에 깊은 연민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환자들에게 잘 하세요간호사를 돌아보며 엉뚱한 말로 내 감정을 돌려본다.

사람의 가슴에 과일의 씨방처럼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은 사랑이 아닐까.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살다 보면 가치와 서열이 헛갈릴 때가 많다.

환자가 의사 덕에 사는 건지 의사가 환자 덕에 사는 건지..

생명을 지켜보면 죽음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본다.

난 환자의 손을 놓지 않게 되기를 노력한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돌아서며 뒷모습을 보이는 건 의사인 나다.

환자는 절대로 등을 보이며 떠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도 떠나는 뒷모습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죽음이 있기에 사람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공부는 할수록 모르는 게 많고 세상도 살수록 알지 못하는 게 많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