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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망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만 말로 흥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그만큼 말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인 강원국에 따르면 " 대화는 말하는 사람의 수사학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심리학이다"이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대단한 인사이트다.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문장이다. 

말은 말하기 전에만 내 것이다. 말하고 난 다음에는, 내 입을 떠난 말은 듣는 사람의 것이다. 그것도 듣는 사람의 심리에 달렸다. 사람 간의 대화가 왜 어려웠는지? 왜 그렇게 오해를 불러왔는지? 왜 확증편향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 문장 하나로 단박에 정리가 되어버린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거인의 눈높이로 세상을 볼 수 있다. 범인은 땅바닥에서 10년을 헤매 봐야 겨우 오솔길 정도 발견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숲 꼭대기에서 지평을 바라보는 거인의 시야를 따라가면 각찰(覺察)할 수 있다. 거인들의 뒤를 따를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일상은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난다. 말은 언어다. 내 안의 언어가 생각이다. 언어는 순서다. 순서가 인지를 만들고 개념을 만든다. 개념은 맥락을 만든다. 언어는 맥락을 벗어나면 의미가 없다. 이 의미를 상대에게 전해야 한다. 그것이 말이고 그 과정이 대화다.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자가 만들고 형성한 의미인데 그것을 말을 통해 전달해야 하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심지어 설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설득을 하려는 순간 대화에 문제가 생긴다. 설득은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데로 행동하게 만들려는 의도이거나 내 생각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는 듣는 사람의 문제다. 듣는 사람의 인과 관계에 따라 던져진 말을 받아들인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대화는 반드시 상대방을 앞에 두고 해야 가능하다. 혼자 하는 대화는 독백일 따름이다. 앞에 있는 상대와 대화를 할 때는 내 표정, 제스처 등 비언어적 표현으로 80%를 전달한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 보고 있다. 앞에 있지만 서로 먼 산을 바라보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바로 대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화의 세계 90%는 말투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말은 듣는 사람의 정서로, 감정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표정 및 제스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다. 말을 포장하는 형식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의 감정과 정서를 지배해 버린다. 대화는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바로 우리 몸의 자율신경이 바탕이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 내 몸의 상태와 컨디션이 대화의 질을 결정한다. 이 컨디션을 바로 자율신경이 지배하고 조절하고 있다. 대화도 바로 내 몸 상태로 귀결되는 것이다. 지난밤, 숙면을 취하고 출근길에 예전 듣던 노래도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면 출근길이 기분 좋고 활기차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회의에 들어가면 긍정적으로 대할 수 있다. 설사 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좋은 일로 바뀔 것이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내 몸의 상태와 대화를 할 상대의 몸 상태에 따라 대화의 심리학은 조율을 한다. 그중에 상대의 심리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함은 자명하다. 이미 말은 나를 떠나 상대방의 심리와 융합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은 사간의심(辭簡意深 : 간결하되 뜻은 깊어야 한다)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문장가였던 한유(韓愈)는 "풍이불여일언(豊而不餘一言) 약이불실일사(約而不失一辭)"라 했다. "풍부하되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간략하지만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과 글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요즘 세태에 곱씹어볼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