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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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읽고 있는데도 잘 그려진 수묵화 한 폭이 스치며 지나 갑니다.

 

어린 시절 하루에 버스가 한 대 다닐까 말까한 시골에 살았는데

내 생일이라며 외할머니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버스가 내리는 곳은 내 걸음으로 20분 이상은 걸어야 하는데라

언제쯤 오실까하고 뛰어갔습니다. 딱 이맘때가 제 생일이니 

춥기도 오살라게 많이 추었습니다. 

 가는동안 전기줄은 윙윙윙 바람을 가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바람에 날리는 눈발에 가려 저 멀리 대나무 숲만 보였습니다. 

 

한 참을 뛰어가도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눈이 많이 와서 못 오시나보다

하고 집에 돌아갔더니 외할머니께서 집에 와 계셨습니다. 

 서로 갈림길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지요. 

 

손택수의 묵죽을 읽으면 그 때가 떠오릅니다. 묵죽은 분명히 아침햇살에 짙은 농담이 가득하고

사르르 사르르 내리는 눈이 어여쁜 시인데도 저에겐 외할머니께서 오시던 날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제 생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시던 날 늦잠 자는 통에 외할머니 가시는 건

못보고 눈에 찍힌 발자욱만 멍하니 내 눈에 들어와서 였나 봅니다. 췌장암으로 검게 탄 

얼굴로 하얀 시트 위에서 돌아가시는 모습 보아서였나 봅니다. 그래서 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