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래된 지도를 들고 걷는 사람에게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한의학’이라는 세 글자를 꺼내는 순간, 세상이 둘로 나뉘어 서로를 겨누는 광경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수천 년 전의 기록을 티끌 하나 틀리지 않은 절대 진리로 떠받들며 신비의 베일을 씌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현대 과학의 잣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낡은 미신이자 가짜 약 취급을 하며 조롱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도 전에 덜컥 겁부터 났습니다. 내가 써 내려갈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신비주의적 변명’으로 오해받거나, 누군가에게는 ‘비과학에 대한 억지 끼워 맞추기’로 읽히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 양극단의 피로한 싸움 속에서는 정작 우리가 진짜 나누어야 할 ‘몸과 생명에 대한 대화’가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마니까요.

그래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작은 깜빡이를 켜듯 이 조심스러운 마음부터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고 한의학을 믿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믿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맹신도, 지금의 과학적 언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배척도, 결국 대상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게으른 태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믿든 비판하든, 적어도 옛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 본래의 시선만큼은 오해 없이 읽어달라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은 눈부실 만큼 정밀합니다. 몸을 기관으로, 조직으로, 세포와 유전자로 끊임없이 쪼개어 들어갑니다. 분자 하나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신호를 주고받는지를 추적합니다. 그 세밀한 칼날 덕분에 인류는 질병의 수수께끼를 전에 없던 깊이까지 파헤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전의학은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쪼개는 대신, 살아 숨 쉬는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들의 관계’를 지켜보았습니다.

추운 바람을 쐬었을 때 왜 기침이 나면서 동시에 피부에 소름이 돋고 땀구멍이 닫히는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왜 옆구리가 결리고 소화가 멈추며 감정이 널뛰는지. 이처럼 함께 묶여 나타나는 생명 현상의 흐름을 오랜 세월 관찰하고, 그것을 하나의 언어로 묶어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오장(五臟)은 바로 그 고민의 산물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한의학의 ‘폐(肺)’를 현대 해부학의 ‘허파(lung)’와 1:1로 겹쳐 읽는 데서 시작됩니다.

해부학적 폐를 기준으로 고전을 읽으면 기괴한 문장투성이로 보입니다. “폐가 피부와 털을 주관한다(肺主皮毛)”, “폐가 체액의 길을 통하게 한다(肺主行水)” 같은 말을 마주하면 ‘허파가 숨만 쉬면 됐지 왜 피부와 물까지 간섭하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번역의 출발점부터 어긋나 있었으니까요.

고대인들에게 폐는 가슴속에 들어앉은 장기 하나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호흡을 통해 외부 공기와 만나는 일, 그 과정에서 체온과 체액을 조절하고, 피부라는 가장 바깥의 경계면을 방어하는 일련의 ‘통합적인 생리 기능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즉, 오장은 장기의 목록이 아니라, 복잡한 생명 현상을 분류하고 이해하기 위해 세워둔 ‘기능적 모델’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사람들이 현대의 신경-면역-내분비 복합 네트워크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식의 허황된 신화나 후광을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세포를 들여다볼 현미경도, 호르몬을 측정할 도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살던 시대의 가장 익숙한 언어를 빌려왔을 뿐입니다. 국가의 관직(君主, 相傅)에 빗대어 장부의 역할을 설명하고, 계절과 바람과 물과 불의 성질을 빌려 몸의 변화를 묘사했습니다(取象比類).

지금 우리가 유전자를 이야기할 때 ‘코드(code)’나 ‘스위치(switch)’라는 기계적 비유를 쓰는 것처럼, 그들도 당시의 세계관으로 생명의 질서를 풀어냈던 것입니다.

그들이 대단한 것은 미래의 과학 지식을 미리 알아서가 아닙니다. 현대 생리학의 세부 기전을 알지 못했음에도, 살아 있는 사람을 끝없이 관찰하며 “이 현상과 저 현상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인다”는 거대한 생명의 패턴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포착해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오래된 모델이 전부 옳을 리는 없습니다. 어떤 설명은 당대의 지식적 한계로 인해 잘못 짚었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오늘의 과학으로 고쳐 써야 마땅합니다. 현대 과학 용어를 옛 문장에 억지로 끼워 맞추며 “우리 선조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포장하는 일만큼 공허한 것도 없습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왜 이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 보았을까?”

“그들이 남긴 거친 관찰 속에는, 우리가 분절된 시선으로 보느라 놓쳐버린 어떤 생명의 연결고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업은 한의학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판정승부가 아닙니다. 현대의학과 대립각을 세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몸과 마음의 본질, 즉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얻고자 하는 조심스러운 시도일 뿐입니다.

한의학은 내게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 오래되어 유리창에 때가 끼고 군데군데 왜곡이 있는 낡은 창문과 같습니다.

어떤 풍경은 굴절되어 보일 테지만, 가끔은 우리가 늘 들여다보던 현대적인 창문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던 생명의 한 자락을 불쑥 보여주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그 창문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것도, 돌을 던져 깨뜨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창문으로 밖을 한 번 내다본 뒤, 다시 돌아와 현대의 창문으로 그 자리를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앞으로 시작할 오장(五臟)의 순례는 그런 마음으로 떠나려 합니다.

오래된 지도를 손에 쥐되, 지도에 억지로 길을 꿰맞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걷다가 길이 끊겨 있으면 끊긴 대로, 지도가 가리킨 곳에 실제로 샘물이 솟고 있다면 그 경이로움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생각입니다.

그 길 위에서 수천 년 전의 낡은 문장 하나가, 지금 내 몸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단면을 단 1초라도 선명하게 비추어준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以醫爲鑑 窮生生之理"
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 현상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丙午夏 溫谷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