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폐(肺)로 가는 길] 第1程. 안과 밖의 경계 — 숨이 막히던 시절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늘 걷던 익숙하고 호젓한 산책로였지만, 오늘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는 사뭇 달랐다. 내 몸속 깊은 곳, 생명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순례의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발은 익숙한 흙길을 디디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내내 하나의 물음이 맴돌았다.
‘폐(肺)의 마을로 가는 길을 대체 어디에서부터 열어야 할까.’
먼저 현대 생리학의 설명을 떠올려보았다. 들이마신 공기는 기도를 타고 허파 깊숙이 내려가 수억 개의 폐포(허파꽈리)에 닿는다. 그곳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공기와 혈액 사이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치열한 맞교환이 일어난다. 이 미세한 교환이 단 몇 분만 멈춰도 생명은 곧장 스러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폐는 지극히 정교하고 거대한 ‘가스 교환 장치’다.
반면 고전의학은 폐를 조금 다른 결로 그려냈다. 호흡을 주관하며 온몸의 기(氣)를 다스리고, 선발(宣發, 밖과 위로 뿜어냄)과 숙강(肅降, 안과 아래로 내림)을 통해 몸 안팎의 흐름을 조율하는 장기로 보았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폐를 일러 오장육부를 보좌하며 전체의 질서를 다스리는 ‘상부지관(相傅之官)’, 즉 나라의 재상(宰相)에 비유했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품어온 폐의 이미지는, 조금 깐깐하지만 몸 전체의 질서를 빈틈없이 살피는 노련한 정치가에 가까웠다.
한쪽에는 정밀한 가스 교환 기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몸 전체의 조화를 지휘하는 재상이 있었다.
둘 다 매력적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첫 발걸음을 떼기 위한 디딤돌로는 어딘가 너무 매끄럽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폐의 해부학적 구조나 교과서적인 정의를 읊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왜 이 장기가 살아 숨 쉬는 우리에게 그토록 절박하고 원초적인지, 그 서늘한 실감이 처음 내 몸을 파고들었던 자리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하고 싶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을 때였다. 산책로 저편에서 거칠고 날카로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중년 남성이 벤치에 기댄 채 상체를 깊게 웅크리고 연신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곁을 지나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슬그머니 걸음을 멈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기침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기침 소리가 공기를 가르는 순간, 나 역시 무의식중에 숨을 턱 멈추고 말았다. 문득 그 반응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이미 다 지나간 시절이라 여겼는데, 몸은 여전히 그 공포의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기침 소리에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무심코 들이마시던 공기마저 의심하고 경계하던 시절.
코로나였다.
그저 평범하게 숨 쉬는 일조차 공포가 되었던 그 시절.
당시 병원 응급실에는 숨이 가빠 헐떡이는 환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환자들의 얼굴에는 다급하게 산소마스크가 씌워졌고, 손끝마다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매달렸다. 차가운 기계음이 빗발치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 모금의 숨을 더 들이켜려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다. 의료진은 땀이 줄줄 흐르는 방호복과 겹겹의 마스크, 얼굴을 짓누르는 의료용 안면 보호대를 뒤집어쓴 채 숨 가쁘게 뛰어다녔다. 안면 보호대 안쪽에는 습기가 자욱하게 차올랐고, 흉부 압박과 기도 삽관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인공호흡기의 날카로운 경보음과 환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뒤엉킨 아수라장이었다.
근무 교대 시간이 되어서야 복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간호사는 방호복을 벗고 마스크를 걷어냈다. 콧대와 양 뺨에는 마스크에 눌려 피가 맺힌 듯 붉고 선명한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타인의 호흡을 지켜내기 위해, 의료진은 정작 방호복이라는 감옥 안에서 가쁜 숨을 삼키며 자신의 호흡을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감염을 막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타인과의 물리적 단절이었다. 매일 아침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재난처럼 보도되었고, 국경은 닫혔으며 학교와 일터는 멈춰 섰다. 다정한 신체 접촉도,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상도 모두 금지되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거대한 문명의 톱니바퀴가 곳곳에서 삐걱거리며 멈추었다.
그때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류가 제아무리 눈부시고 정교한 문명을 쌓아 올렸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연약하고 원초적인 생물학적 조건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숨을 쉬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단 1분이라도 그 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이 바깥 세계의 공기를 내 몸의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곳까지 끊임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서늘한 진실을 말이다.
결국 나 역시 그 거대한 감염의 파도를 비껴가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목구멍 안쪽에서 까끌까끌한 통증이 번지고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오한이 기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조금 엉뚱하게도 학구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당시 나는 고전의학 중에서도 정수로 꼽히는 『상한론(傷寒論)』에 깊이 빠져 있었다. 후한 말기의 명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이 책은, 감염병(외감병)이 진행됨에 따라 인체가 보이는 전신 반응을 태양(太陽)·양명(陽明)·소양(少陽)·태음(太陰)·소음(少陰)·궐음(厥陰)이라는 ‘육경(六經)’의 틀로 명쾌하게 정리한 걸작이다. 오한과 발열, 땀과 갈증의 변화, 소화 상태와 기력의 쇠락, 심지어 의식과 감정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추적하며 병의 위치와 흐름에 따라 맞춤형 처방을 제시한다. 병을 단순히 고정된 병명 하나로 가두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몸 전체의 상태’를 동적으로 포착해낸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느꼈던 전율은, 수천 년 전의 인물이 환자가 앓아가는 과정을 이토록 정밀하게 관찰해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로 엮어냈다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육경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병이 태양에서 시작되어 양명과 소양을 거쳐, 태음·소음·궐음으로 한 계단씩 차례차례 깊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마치 질병이 정해진 여섯 개의 관문을 순서대로 통과하는 일직선 진행표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심 궁금했다. 정말 실제 사람의 몸에서도 책처럼 그렇게 정직하게 흘러갈까? 체온계의 숫자가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속으로 은밀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내 몸으로 직접 검증해볼 기회가 왔다!’
책 속의 활자로만 보던 육경의 변화를 내 몸을 실험실 삼아 생생하게 관찰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오한과 발열이 교차하는 순간, 땀이 터져 나오는 양상, 통증의 변화를 낱낱이 기록해보겠노라 벼렀다. 지금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오만하고 철딱서니 없는 치기였다.
실제로 내 몸에서 벌어진 일은 여섯 칸짜리 예쁜 진행표 따위가 아니었다. 열은 순식간에 펄펄 끓어올라 나의 순진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머릿속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고 시야가 어지럽게 핑핑 돌았다. 침을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면도날로 목구멍 안쪽을 긁어내는 듯한 난생처음 겪어보는 생경한 통증이 밀려왔다. 숨조차 제대로 들이쉬기 힘들 만큼 목이 찢겨나가는 고통 속에서 온몸의 관절과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두꺼운 이불을 두 겹이나 덮어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들이닥치더니, 불과 몇 분 뒤에는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땀을 쏟아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가슴 한복판에 기분 나쁜 서늘함과 뜨거운 통증이 동시에 엉겨 붙었다.
‘아, 사람이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몸의 변화를 차분히 관찰하고 기록하겠다던 당찬 다짐은 땀으로 흠뻑 젖은 이불 속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압도적인 고열과 통증 앞에서는 누구나 한없이 나약하고 비참한 생물학적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뼈가 쑤시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면 그 어떤 고상한 이론이나 철학적 탐구심도 끼어들 틈이 없다. 아플 때는 그저 미칠 듯이 아플 뿐이었다. 모든 우아한 의학 이론은 이 처절하고 날것의 고통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사치였다.
열병의 고비를 넘기고 한참 뒤 몸을 추스른 뒤에야 『상한론』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육경의 순서를 환자가 반드시 차례로 밟아가는 ‘단계적 코스’로 이해한 것부터가 얕은 오해였다. 실제 병의 전변(傳變, 병이 번져나가는 양상)은 경락을 훌쩍 건너뛰기도 하고, 서로 다른 단계가 복합적으로 뒤섞이기도 하며, 환자의 본래 체질에 따라 전혀 다른 길로 폭주하기도 한다. 질병이 고작 여섯 칸의 계단을 정직하게 내려가는 식이라면 의학이 그토록 어려울 리가 없었다. 책이 단순했던 것이 아니라, 내 시야가 글자 뒤에 숨은 생명의 역동을 읽어내지 못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지독했던 고통의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근원적인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했다.
평소에는 너무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숨’이라는 행위가, 실은 바깥 세계를 내 몸의 가장 깊숙한 안방까지 무방비로 초대하는 일이었다는 것. 살아 숨 쉬기 위해 기꺼이 열어두어야 하는 그 통로가, 언제든 치명적인 위험이 들이닥치는 침입로가 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그때부터 폐라는 장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멈췄던 걸음을 떼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멀리서 들려오던 기침 소리도 바람결에 흩어졌다. 호젓한 길을 걷다 보니, 코로나라는 질병의 풍경이 조금 더 넓은 사유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숙주 세포 안으로 침투해야만 비로소 자신을 증식할 수 있다. 내 몸 바깥에 떠돌던 미지의 존재가 경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일. 결국 감염이란 ‘나’와 ‘외부 세계’가 날카롭게 맞부딪히는 최전선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깥 세계와의 문을 꽁꽁 닫아 건 채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삼켜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밖의 것을 안으로 들이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 수용 없이는 생명이라는 기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위험을 막아내려면 문을 굳게 닫아야 한다.
하지만 살아 숨 쉬려면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생명이라는 위태로운 존재는 대체 이 지독한 모순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폐는 더 이상 해부학 책에 나오는 단순한 가스 교환 기관으로 보이지 않았다. 폐는 바깥의 거대한 세계가 내 몸이라는 작은 우주의 가장 깊숙한 내실로 들이닥치는 ‘거대한 접경지’였다.
그 위태로운 국경선에서는 대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생각에 잠기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침 소리와 코로나의 기억에서 출발했는데, 어느새 생각의 줄기는 내부와 외부, 열림과 닫힘이라는 생명의 근원적인 문제로 뻗어나가 있었다.
‘내가 너무 앞서나간 걸까.’
가만히 제자리에 서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차가운 바깥 공기가 차올랐다. 방금 전까지 철저히 ‘내가 아니었던’ 바깥의 조각이 내 몸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잠시 머물더니, 이내 나의 온기와 습기를 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빠져나갔다.
숨의 결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니, 호흡이란 참으로 기이하고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바깥 세계를 내 안으로 기꺼이 초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흐름에 나를 송두리째 내맡기거나 세상과 무분별하게 뒤섞여버려서는 안 된다. 세계를 들이마시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고유한 형태와 경계를 꼿꼿하게 지켜내야 한다. 명확하게 나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어야만 하는 역설.
그 순간 머릿속에 ‘경계(境界)’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와 세상을 가르고,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이 숨결의 경계선은 침입을 막기 위해 높게 쌓아 올린 단단한 ‘성벽’일까. 아니면 나와 다른 타자가 비로소 안전하게 조우하기 위해 마련된 너른 ‘만남의 광장’일까.
나는 그 경계의 의미를 곱씹으며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호흡이란 내가 세상과 맺는 가장 원초적인 접촉이자, 동시에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간극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자 그 간극의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개의 결정적인 장면이 뇌리에 스쳤다.
한쪽 끝에는 ‘생의 첫 순간’이 있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던 아기가 마침내 차가운 세상 밖으로 밀려 나온다. 그전까지 양수로 가득 차 있던 작고 축축한 폐포에 난생처음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가고, 여린 가슴팍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첫 울음소리. 아직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핏덩이 생명이 자기 폐로 처음 바깥세상을 받아들이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이어지던 기생의 방식이 끝나고, 스스로의 호흡으로 세상과 관계 맺기 시작하는 독립의 선언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 끝에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놓여 있다.
누군가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침묵이 있다. 거칠게 이어지던 숨소리가 점차 얕아지고, 한 번의 들숨과 다음 날숨 사이의 침묵이 끝없이 길어진다.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그 아득한 간격을 바라본다. 마침내 길고 무거운 마지막 숨 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다음 숨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내쉬며 관계를 시작하고,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어들인다. 한 인간의 찬란하고도 지난했던 전 생애가, 결국 그 첫 호흡과 마지막 호흡이라는 두 경계선 사이에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나도 모르게 터덜터덜 걷던 걸음이 느려졌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폐의 마을로 향하는 첫걸음을 어떻게 뗄까 고민했을 뿐인데, 산책로 벤치에서 시작된 사유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 있었다. 코로나의 공포, 상한론의 육경,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 그리고 생의 첫 숨과 마지막 숨까지.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수록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더 무겁고 답답해져 왔다. 교과서 속의 지식을 그러모아 폐라는 장기를 명쾌하게 정리하려 들수록, 정작 내가 붙잡고 싶었던 생명의 신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아득해지는 듯했다.
결국 나는 산책로 한가운데 멈춰 서서, 다시 가장 원초적인 물음 앞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폐는 정말 그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기계적인 기관에 불과한 것일까.’
아직은 어떤 명쾌한 답도 내릴 수 없다. 내일은 이 길을 조금 더 깊숙이 걸어가 보아야겠다.
머릿속을 맴돌던 거대한 관념들을 털어내듯 발밑의 단단한 흙을 힘주어 디디며, 나는 천천히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以醫爲鑑 窮生生之理"
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 현상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丙午夏 溫谷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