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폐(肺)로 가는 길] 第3程. 타자의 흔적 — 경계는 무엇을 받아들이는가
“이번 분기 안에는 어떻게든 가시적인 결론을 내주셔야 합니다.”
보고서를 덮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무거웠다. 지연된 일정, 기대에 미치지 못한 실적, 삐걱거리는 팀의 문제까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돌아왔다. 마땅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턱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 안쪽이 바짝 말랐다.
“……네, 알겠습니다. 다시 챙겨보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명치 끝이 맷돌에 눌린 듯 조여들었다. 아침을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건만 뱃속은 더부룩했고, 헛트림이라도 나올 것처럼 목구멍이 답답하게 메어왔다. 곧장 차를 몰아 지방 출장길에 올랐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뱃속 깊은 곳에서 살살 꼬이는 듯한 불길한 신호가 시작되었다. 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랫배가 뻐근해져 왔다. 처음에는 그저 한숨 돌리면 가라앉겠지 싶어 첫 번째 휴게소 표지판을 무심코 지나쳤다.
하지만 차가 속도를 낼수록 배 안쪽의 뒤틀림은 점점 참기 힘들 정도로 위험해졌다.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운전대를 고쳐 잡던 찰나, 다행히 전방 1km 앞에 다음 휴게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휴게소에 들어가 차를 대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화장실로 향했다. 배를 움켜쥐고 종종걸음을 치는 그 급박한 와중에도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머리로 스트레스 받아놓고선, 왜 맨날 죄 없는 장(腸)이 고생인지.’
그 생각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밀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빈칸을 찾아 뛰어들어가 문을 닫았다. 철컥. 걸쇠가 맞물리는 짧은 금속음과 함께 비로소 바깥세상과 나 사이에 얇은 차단막 하나가 드리워졌다.
간발의 차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겨우 한숨을 돌리며 돌아서서 변좌를 내려다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플라스틱 변좌 한구석에 맺힌 정체 모를 물방울 몇 점.
화장지를 넉넉히 뜯어내 두 번, 세 번 힘주어 닦아냈다. 그래도 망설여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엉덩이를 내렸다.
살갗이 닿는 찰나, 플라스틱 표면을 통해 아주 희미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차가워야 할 플라스틱에 배어 있는, 미지근한 타인의 체온.
순간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으며 몸을 움찔 물러섰다.
눈에 보이는 오염도 아니었고, 유해한 균이 묻어 있다는 증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살갗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불쑥 솟구쳤다.
내가 불쾌했던 것은 정말 세균이나 더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방금 전까지 낯선 누군가의 맨살이 머물렀다 떠난, 지워지지 않은 ‘타자의 흔적’ 그 자체였을까.
그 찝찝함도 잠시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잡생각은 이내 흩어졌다.
무심하게 화면을 넘기며 포털의 뉴스 헤드라인을 훑고, 밀린 메신저 알림을 확인하고, 날씨와 미세먼지 수치를 뒤적였다. 멍하니 짧은 영상 하나를 넘기다 문득 자조적인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의 체온이 닿았다고 온몸을 곤두세우더니, 어느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주저앉아 화면 속 세상에 빠져 있구나.’
살갗에 닿았던 낯선 이의 온기는 어느새 내 체온과 뒤섞여 사라졌고, 곤두섰던 신경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뎌져 있었다.
몸은 늘 이런 식이다.
매 순간 들이닥치는 낯선 자극에 매번 날을 세우는 듯 보이지만, 당장 해가 되지 않는 무수한 접촉들은 이내 조용히 품어 흘려보낸다.
칸막이 너머로 바깥세상의 소리들이 쉼 없이 밀려들었다.
덜컹거리며 열리는 출입문 소리, 세면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손을 말리는 핸드드라이어의 요란한 모터음, 옆 칸에서 풀려나가는 화장지 소리와 헛기침.
“아빠, 나 혼자 손 다 씻었어!” 하고 자랑스레 외치는 아이의 맑은 목소리까지 칸막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 칸 안에 웅크린 우리는 저마다 완벽하게 고립된 듯하지만, 소리와 냄새와 공기를 통해 서로의 기척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나뉘어 있으되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이어져 있으되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기묘한 공간.
태안 바닷가에서 떠올렸던 문장이 이 좁은 칸 안에서 다시금 맴돌았다.
“분이불리(分而不離), 통이불혼(通而不混).”
나뉘어 있으되 떨어지지 않고, 통하되 뒤섞여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문을 걸어 잠가도 바깥은 끊임없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각은 문짝 하나로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지만, 화장실 특유의 축축하고 퀴퀴한 공기는 숨결을 타고 폐포 깊숙이 스며들었다. 숨을 들이쉬는 한,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몸의 경계 또한 다르지 않다.
피부는 각질과 땀으로 둘러싸여 있고 점막은 촉촉한 점액을 두르고 있지만, 살아 있는 생명은 세상을 향해 빗장을 완전히 걸어 잠글 수 없다. 살아가려면 음식을 삼켜야 하고, 무엇보다 1분에 수십 번씩 바깥의 공기를 허파 깊숙이 들이켜야 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막으려면 닫아야 하고, 살아 있으려면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문 안에서 정말로 혼자 있는 것일까.
사회적으로는 철저히 혼자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완벽한 나 혼자’라는 생각은 단번에 무너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피부 표면과 모공 틈새, 그리고 뱃속 장관(腸管) 안에는 수십 조 마리에 달하는 미생물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 상재 미생물(Resident Microbiota)들은 씻어내지 못해 남아 있는 불결한 오염 물질이 아니다. 그들은 장벽의 자리를 미리 촘촘하게 선점해 위험한 병원균이 발붙이지 못하게 막아서고, 몸에 유익한 대사를 도우며, 면역계가 너무 날뛰거나 처지지 않도록 조율한다.
내 몸의 장벽은 침입자를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차가운 성벽이 아니었다. 수많은 타자들과 공생의 규칙을 나누며 삶의 질서를 가꾸는 능동적인 생태계였다. 내 몸은 애초부터 ‘나 아닌 것’을 모조리 지워버린 무균실로 설계되지 않았다.
타자(他者)라고 해서 반드시 적인 것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퀴퀴한 화장실 공기를 가만히 들이마셔 본다.
장이 수많은 타자를 품어 기르며 함께 살아가는 ‘정주(定住)의 경계’라면, 지금 숨이 드나드는 폐(肺)는 조금 다른 경계다.
건강한 폐와 하기도(下氣道)는 장처럼 거대한 균 무리가 터를 잡고 살지 않는다. 미생물의 밀도가 극도로 낮은 상태로 유지된다. 코와 기도를 거쳐 들어온 이물질들을 끈적한 점액과 섬모 운동이 끊임없이 밖으로 쓸어내기 때문이다.
폐는 타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타자가 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통과의 경계’다.
숨 한 번 들이켤 때마다 바깥의 먼지, 꽃가루, 미세입자, 이름 모를 미생물들이 폐포 깊숙이 밀려 들어온다.
그러나 폐는 스쳐 지나가는 그 모든 이방인에게 일일이 경보를 울리며 싸움을 걸지 않는다. 만약 1분에 스무 번씩 들이마시는 그 모든 티끌에 매번 염증의 불길을 당겼다면, 산소를 교환해야 할 연약한 허파꽈리는 진작에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면역을 ‘내 것(Self)과 남의 것(Non-self)을 구별하여, 남의 것을 찾아내 섬멸하는 전쟁’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이분법은 일상의 몸 앞에서 금세 힘을 잃는다.
오늘 아침에 먹은 밥 한 숟가락도 나의 유전자가 아니며, 장 속에 가득한 유익균도 온전한 나 자신은 아니다. 가을바람에 날려 온 꽃가루 역시 명백한 남의 것이다. 그런데도 몸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지 않는다.
반대로 바깥에서 아무런 병원균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내 몸의 조직이 찢기거나 으깨지며 터져 나온 내부의 손상 신호(DAMPs, 손상 관련 분자 패턴) 앞에서는 면역계가 무섭게 타오르며 격렬한 염증을 일으킨다.
현대 면역학의 ‘위험 이론(Danger Theory)’이 짚어내듯, 몸은 상대의 신분증에 적힌 ‘나인가, 남인가’만을 따지지 않는다. 그가 지금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가, 이 만남이 상처를 내고 있는가라는 맥락을 함께 살핀다.
어쩌면 몸이 세상에 던지는 진짜 질문은 ‘너는 나인가, 남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너와 내가 맺는 이 만남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휴대폰 화면을 켜자 ‘가을철 잡초 꽃가루 주의’라는 짤막한 기상 알림이 떴다. 해마다 9월이면 눈물 콧물을 쏟으며 마스크 없이는 바깥을 걷지 못하던 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같은 초가을, 같은 길을 걸으며 똑같은 쑥과 환삼덩굴 꽃가루를 마시는데, 왜 누군가는 불어오는 계절의 바람을 온전히 누리고, 누군가는 숨통이 조여드는 고통 속에 헐떡여야 하는가. 꽃가루 자체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맹독은 아니다.
문제는 기도 상피 장벽이 그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무해한 자극에 대한 경보 장치가 지나치게 낮게 걸려 있는 몸에서는, 기도 점막과 면역세포들이 사소한 스침에도 과도하게 들고일어난다. 기관지가 경련하듯 수축하고 점액이 쏟아져 숨길을 가로막는다. 들어온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위험한 침입으로 오판한 내 몸의 과민한 방어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들어왔느냐만이 아니라, 내 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있었다.
그렇기에 몸에게는 알아채고 싸우는 힘만큼이나, 불필요한 반응을 내리누르고 조용히 넘겨주는 지혜가 절실하다.
면역학에서는 이 정교한 절제력을 면역관용(Immunological tolerance)이라 부른다.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오가는 폐포막의 두께는 불과 1마이크로미터 안팎의 투명하고 연약한 막이다. 이곳에서 면역계가 사소한 자극마다 불을 지르고 진물을 채운다면 숨을 쉰다는 생명의 기본 조건 자체가 무너진다.
건강한 폐에는 싸울 수 있는 능력만큼, ‘싸우지 않을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하다.
관용이란 무력하게 침략을 방관하는 나약함이 아니다. 반응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스스로 격발 장치를 누르지 않는, 고도로 훈련된 생명의 적극적인 조절력이다.
물론 치명적인 균이 침입했을 때는 칼을 빼 들어 상대를 물리치고 제거하는 저항(Resistance)의 전략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싸움의 한복판에서도 내 조직이 망가지지 않도록 방어막을 치고 기능을 보존하며 버텨내는 질병 관용(Disease tolerance) 역시 생명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다.
살아남는 길은 언제나 적을 더 많이 죽이는 데에만 있지 않다. 나를 온전히 보존하며 그 파도를 견뎌내는 데에도 있다.
뒤틀리던 뱃속이 한결 잦아들었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몸 안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수순을 떠올렸다.
시작된 싸움은 반드시 끝이 나야 한다.
염증 또한 병원체가 물러갔다고 해서 저절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의 염증세포 유입을 차단하고, 전장에 흩어진 잔해를 삼켜 치우며, 파괴 태세를 갖추었던 조직을 복구 모드로 되돌리는 정밀한 수습 프로그램이 제때 작동해야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병은 제때 싸우지 못해서 생기기도 하지만, 끝내야 할 싸움을 멈추지 못해 생기기도 한다.
무엇이 들어왔는지 알아채고(식별),
싸워야 할 상대인지 가늠하며(관용),
불가피하다면 알맞은 크기로 맞서고(반응),
때가 되면 칼을 거두며(종료),
상처 입은 자리를 본래의 결대로 복구하는 것(회복).
이 흐름은 박제된 교과서의 도식이 아니라, 내가 문을 잠그고 들어와 변좌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이 짧은 순간에도 내 몸의 세포들이 묵묵히 벼려내고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니였을까.
그 사유의 언저리에서 오래전 읽었던 《영추(靈樞)》의 한 구절이 스치듯 떠올랐다.
《영추》 제47편 「본장(本藏)」 몸의 바깥 경계를 지키는 기운, 위기(衛氣)를 논하는 대목이다.
「衛氣者,所以溫分肉,充皮膚,肥腠理,司關闔者也。」
(위기란 살결을 덥히고 피부를 채우며 결을 윤택하게 하고, 그 열리고 닫힘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어 고전은 그 기운이 가장 온전한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衛氣和,則分肉解利,皮膚調柔,腠理緻密矣。」
(위기가 조화로우면 살결이 풀려 부드럽게 통하고, 피부가 고르고 유연해지며, 결이 치밀해진다.)
위기(衛氣)를 현대 면역학의 개념과 섣불리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고전이 짚어낸 위기는 단순히 밖에서 쳐들어오는 사기(邪氣)를 막아내는 방패막이가 아니었다. 체표의 온기를 유지하고, 살갗을 유연하게 다스리며, 안팎의 ‘열리고 닫힘(關闔)’을 지휘하는 능동적인 조절자였다.
그 구절 속에서 유난히 마음을 붙들었던 글자는 다름 아닌 ‘화(和)’였다.
고전은 위기가 단단해야(固) 한다거나 강해야(强) 한다고 단정 짓지 않았다.
‘위기화(衛氣和)’
지킨다는 것의 본질은 상대를 때려잡는 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만남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조율하는 능력에 있다는 직관.
경계의 건강함이란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그는 결벽이 아니라, 마땅히 열 때 열고 닫을 때 닫으며 안과 밖의 균형을 잃지 않는 데 있었다.
꽃가루 한 톨에 기도가 좁아지고, 사소한 자극에 과민한 염증을 터뜨리며, 싸움이 끝난 뒤에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계의 수많은 혼란들을 단순히 ‘방어력이 약해졌다(衛氣不固)’는 말로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마음속 노트에 조심스레 적어두었던 글자가 떠올랐다.
‘위기실화(衛氣失和)’
방어의 기운이 본래의 조화와 절도를 잃어버린 상태.
아직은 거친 가설에 불과하지만, 생명이 경계에서 겪는 혼란의 본질을 짚어내기엔 모자람이 없는 이름이었다.
변기 레버를 내리자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흔적이 쓸려 내려갔다. 복통이 가라앉고 나니 출근길부터 명치를 짓누르던 팽팽한 긴장도 한풀 꺾여 있었다.
걸쇠를 풀고 칸 밖으로 나왔다. 밝은 조명 아래 세면대에서 거품을 내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러 씻었다.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장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손끝과 살갗에 묻었을지 모를 타인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내는 것만이 결백한 ‘깨끗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짧은 배설과 사유의 시간을 지나고 나니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몸에게 진정으로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타자의 흔적을 완벽하게 소거해 버린 인공적인 무균실의 상태가 아닐 것이다. 수없이 밀려드는 타자들과의 스침 속에서도, 결코 안쪽의 질서와 조화를 잃지 않는 유연한 균형. 그것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청결함일지 모른다.
종이타월로 물기를 닦아내고 출구로 다가섰다. 문 앞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손길이 스쳐 지나갔을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옷소매를 당기거나 팔꿈치로 밀어내는 대신, 잠시 멈칫하다 맨손으로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누군가의 손에서 묻어난 희미한 물기가 닿았지만, 아까처럼 소름 돋는 불쾌감은 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생을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다. 밖으로 나가면 다시 손을 씻고 일상을 챙기겠지만, 이 손잡이는 더 이상 혐오스러운 오염의 온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맞닿는 물리적인 접점이었다.
손잡이를 밀치자 환한 바깥 빛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가 걸어온 경계의 여정은 조금씩 그 모습을 바꾸어왔다.
第1程에서 경계는, 안과 밖이 위태롭게 부딪히는 위험한 접경지였다.
第2程에서 경계는, 물과 뭍의 오랜 기억을 품고 안과 밖이 스며드는 ‘분이불리(分而不離), 통이불혼(通而不混)’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리고 오늘, 이 공중화장실의 좁은 칸에서 마주한 경계는 또 하나의 얼굴을 드러냈다.
생명의 경계는 타자를 완벽히 몰아내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 아니다.
수없이 오가는 타자들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흘려보내며, 무엇에 맞서고, 언제 다시 평온으로 돌아갈지를 쉼 없이 조율하는 ‘살아 숨 쉬는 관계의 터전’였다.
우리는 타자 없이 단 한순간도 숨 쉴 수 없다. 그러나 그 조율의 힘이 있기에, 타자라는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서도 비로소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
휴게소 주차장으로 걸어 나오며 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폐포 끝까지 닿았다 나가는 청량한 감각.
그러나 사유의 끝자락에서 또 하나의 물음이 고개를 든다.
관용이 소중하다 하여 무작정 너그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저항이 생명의 본능이라 하여 매 순간 칼을 휘둘러서도 안 된다. 염증 또한 불붙여야 할 때 타올라야 하고, 꺼져야 할 때 잦아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경계를 지탱하는 궁극의 열쇠는,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가려내는 ‘선택’의 문제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싸워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싸우고,
물러나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칼을 거두며,
열어야 할 때 열고, 닫아야 할 때 닫는 일.
결국 모든 조율의 바탕에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때(時)’와 ‘리듬(節)’의 맥박이 흐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람을 품은 폐(肺)는 이제 공간의 문을 닫고, 숨이 오르내리는 시간의 박동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以醫爲鑑 窮生生之理"
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 현상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丙午夏 溫谷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