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肺(폐)로 가는 길] 第4程. 숨의 마디 — 몸은 어떻게 때를 맞추는가

“야, 오늘 오랜만에 얼굴 봐서 진짜 좋았다. 넌 신분당선 타지?”

개찰구 앞, 친구가 가방끈을 고쳐 매며 물었다.

“어, 판교 쪽으로. 너는 버스 안 끊겼냐?”

“응, 정류장 바로 앞이라 아직 넉넉해. 맥주 두 잔 마셨더니 알딸딸하니 딱 기분 좋다. 조심히 들어가라. 다음엔 동창회 말고 우리끼리 따로 조용히 한번 보자.”

“그래, 나중에 시간 될 때 톡 하나 남겨.”

서로의 어깨를 툭 치며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뒤돌아서서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데, 뒤편에서 “야, 살 좀 찌우고!” 하는 녀석의 실없는 농담이 한 번 더 날아왔다. 피식 웃으며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소란스럽던 술자리의 열기와 대화의 잔향이 계단을 내려갈수록 서서히 잦아들었다. 플랫폼에 홀로 섰다. 맥주 두어 잔에 뺨으로 은근히 감돌던 온기가, 지하 승강장의 서늘한 공기에 기분 좋게 식어갔다.

어둠 저편에서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열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차내로 들어서자,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특유의 옅은 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늦은 시간이라 빈자리가 제법 보여 안쪽으로 들어가 깊숙이 몸을 묻었다.

치익— 하는 공기압 빠지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닫혔다.
창틀에 미세한 떨림이 번지는가 싶더니, 관성이 몸을 객차 뒤쪽으로 지그시 밀어붙였다. 열차는 매끄럽게 속도를 올렸다.

일정한 속도에 접어들자 몸을 누르던 가속의 감각은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창밖 터널 벽면의 배선과 불빛들이 쏜살같이 뒤로 물러났지만, 객차 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터 소리가 낮아지며 차체가 가볍게 덜컹거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몸의 중심이 객차 앞쪽으로 슬그머니 쏠렸다. 열차는 다음 역 플랫폼 정위치에 정확히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른 이들이 들어찼다.

문이 닫힌다.
몸이 뒤로 밀린다.
어둠 속을 달린다.
속도가 줄어든다.
몸이 앞으로 기운다.
다시 문이 열린다.

역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기계적인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혼잣말 같은 생각이 스쳤다.

‘이 열차는 참 쉼 없이 열렸다 닫히고, 달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는구나.’

좌석에 등을 편안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열차는 어둠 속을 부지런히 달리고 있지만, 좌석 위의 나는 멈춘 채 앉아 있다.

하지만 시선을 살갗 안쪽으로 조용히 돌려보면, 가만히 멈추어 있는 줄 알았던 내 몸 역시 단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가슴팍이 옷자락을 밀어 올리며 슬며시 솟아오른다.
그리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열차의 가속과 감속 너머로, 내 흉강 안쪽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움직임이 손끝의 맥박을 타고 전해져 왔다.


지난 여정의 마지막 질문이 귓가에 맴돌았다.

공중화장실의 좁은 칸에서 살폈던 경계의 법칙들. 싸워야 할 때 싸우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며, 열어야 할 때 열고 닫아야 할 때 닫는 것. 경계의 조화(衛氣和)를 따라가다 도달했던 질문은 결국 알맞은 ‘때(時)’와 질서 있는 ‘마디(節)’였다.

그 물음의 답을 먼 곳에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흡이야말로 매 순간 상태를 바꾸며 자기만의 마디를 끊임없이 새겨나가고 있었다.

호흡의 움직임을 가만히 따라가 본다.

숨을 들이쉴 때 우리는 흔히 가슴이 단순히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 안의 실제 움직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갈비뼈 사이의 근육들이 수축하며 흉곽을 사방으로 넓히는 사이, 가슴과 배를 가르는 막인 횡격막은 아래를 향해 내려앉는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바깥으로 펼쳐지고, 그 넓어진 공간의 압력 차이로 바깥세상의 공기가 몸 안 깊숙이 밀려 들어온다.

날숨에서는 이 흐름이 고스란히 뒤집힌다.
긴장했던 횡격막이 힘을 풀고 둥글게 솟아오르면, 넓어졌던 갈비뼈가 안으로 좁아들며 데워진 공기를 바깥으로 밀어낸다.

숨 한 번의 짧은 찰나 안에는

하강과 상승.
펼침과 거둠.
안과 밖.
열림과 닫힘.

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움직임들이 한 덩어리로 얽혀 있다.

차창에 비친 내 가슴의 오르내림을 바라보다 생각에 잠긴다.


리듬이란 무엇일까.

단지 똑같은 움직임을 시계추처럼 되풀이하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두 상태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전환의 과정일까.

우리는 흔히 리듬을 일정한 박자로 생각한다.
메트로놈의 바늘처럼 좌우를 오가는 오차 없는 규칙성.

똑.
똑.
똑.
똑.

하지만 살아 있는 몸의 호흡은 결코 메트로놈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의자에 기대어 쉴 때의 숨은 깊고 느리지만, 환승 통로 계단을 급히 뛰어오르면 숨은 금세 거칠고 가빠진다. 방금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처럼 문장의 길이에 맞춰 호흡의 박자가 조절되고, 깊은 잠에 빠져들면 의식의 개입 없이 잔잔한 파도처럼 잦아든다. 뜻밖의 소식에 가슴이 내려앉을 때면 숨은 순간적으로 멎어버리기도 한다.

상황이 바뀌면 박자가 변하고, 상황이 지나가면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잔잔한 호흡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하나의 생각이 스친다.

건강한 리듬은 고정된 박자가 아니다. 필요할 때 변화하고, 다시 본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유연함에 가깝다.


지난 여정에서 마주했던 ‘위기화(衛氣和)’의 질서가 호흡의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 겹쳐 보였다.

건강한 경계가 굳게 닫힌 성벽이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문을 여닫는 조화로움이었듯, 건강한 리듬 역시 고정된 박자에 갇힌 뻣뻣함이 아니었다.

조화(和)란 굳어버린 평형이 아니라, 마땅히 변해야 할 때 알맞게 변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유연한 질서였던 것이다.

숨은 허파라는 닫힌 방 안에서 홀로 맴돌다 끝나지 않는다.

第2程, 그 바닷가에서 마주했던 생명이 물에서 뭍으로 올라와 첫 공기를 들이마셨던 진화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육상 호흡의 시작은 단순히 공기주머니 하나가 생겨난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허파로 향하는 혈류와 온몸으로 향하는 혈류를 보다 효율적으로 나누기 위해 심장 내부의 격벽화와 순환 경로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었고, 호흡근과 신경계 역시 긴밀하게 맞물리도록 재편되었다.

그 오랜 결합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가슴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숨을 들이마셔 횡격막이 아래로 내려앉으면, 흉강 내부는 순간적으로 음압(Negative pressure)이 형성된다.

이 압력 차이는 대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돌아오는 혈액을 자연스럽게 빨아들이며 심장을 채운다.

호흡의 주기에 맞추어 심박수 역시 미세하게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한다〔호흡성 동성부정맥(respiratory sinus arrhythmia, RSA)〕.

수억 년 전 공기호흡과 육상 적응의 과정에서 발달해온 호흡과 순환의 협응은, 지금도 한 번의 들숨과 날숨마다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흉강의 움직임은 혈압의 미세한 파동과 맞물리고, 자율신경계의 교감과 부교감 신경은 호흡에 맞추어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조율한다.

코를 통한 호흡의 리듬은 후각피질과 일부 변연계 신경활동에도 호흡 주기의 흔적을 새기고, 호흡에 따라 달라지는 흉강과 복강의 압력은 흉관의 림프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다.

숨 한 번 들이켜는 일은 단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바꾸는 가스교환에 그치지 않았다. 몸 안을 흐르는 여러 체액과 신경계의 여러 영역에 고유한 짜임새를 더하는 생리적인 파동에 가까웠다.

이쯤에 이르면 폐가 온몸의 생체 리듬을 총괄하는 중심이라고 단정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생리학의 사실들을 살펴보면 폐를 일방적인 지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심장에는 스스로 박동을 만들어내는 동방결절이라는 고유한 박동 발생계가 있다. 뇌의 시상하부에는 낮과 밤의 시간을 새기는 시교차상핵이 존재하며, 온몸의 여러 조직과 세포에도 각자의 분자 생체시계가 작동한다. 체온과 호르몬, 수면과 각성 역시 각자 고유한 주기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호흡 리듬을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신경 신호조차 허파 자체가 아니라 뇌간의 호흡중추에서 만들어진다.

폐(肺)는 전신의 모든 리듬을 홀로 지휘하는 중앙 통제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각자 다른 고유한 시간을 품고 있는 몸 안의 수많은 생리계들이, 어떻게 서로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 안에서 이토록 정교하게 시간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일까.

호흡은 그 서로 다른 시간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온몸의 흐름을 잇고 조율하는 매우 크고 역동적인 ‘주기적 사건’으로 몸 안을 흐르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닿자, 고전의학이 그려낸 ‘폐(肺)’라는 오래된 기능 모델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온다.

선인들은 우리 몸을 해부학적 장기들의 고립된 결합으로 보지 않고, 생명이 작동하는 유기적인 기능 패턴으로 묶어 ‘장상(臟象)’이라 불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전은 ‘폐(肺)’라는 이름 아래 언뜻 보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생리적 현상들을 한데 모아놓았다.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는 호흡(呼吸).
온몸의 기운을 다스리는 기(氣).
살갗과 털을 주관하는 피모(皮毛).
땀구멍을 열고 닫는 주리(腠理).
체액의 길을 소통시키는 수도(水道).
온몸의 혈맥이 한데 모여드는 조백맥(朝百脈).
그리고 때와 마디를 다스린다는 치절(治節).

처음 한의학을 접했을 때는 이 방대한 목록이 다소 생경하고 직관적인 관념의 나열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와 땀구멍과 피의 흐름과 소변의 길이 어찌 하나의 장부로 묶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생명 안에서 일어나는 호흡의 파문과 리듬의 결합을 따라온 지금, 오래된 질문은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옛사람들은 왜 이 이질적인 현상들을 굳이 하나의 ‘폐(肺)’라는 범주로 묶어 보았을까.

그들이 주목했던 공통점은 그것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라는 해부학적 위치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가’라는 생명의 운동 양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후대의 고전의학은 이처럼 서로 다른 '폐(肺)'의 작용을 선발(宣發)과 숙강(肅降)이라는 두 방향의 운동으로 체계화해왔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선발은 위로 펴고 바깥으로 펼쳐 퍼뜨리는 움직임이며,
숙강은 아래로 차분히 가라앉히고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움직임이다.

이를 두고 들숨을 숙강에, 날숨을 선발에 도식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해석이 있었지만, 살아 있는 몸의 호흡을 들여다보면 그 도식은 이내 무너진다.

앞서 보았듯 들숨 하나 안에도 횡격막의 하강(숙강)과 흉곽의 팽창(선발)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발과 숙강은 들숨과 날숨이라는 공기의 방향만을 가리키는 좁은 말이 아니었다.

퍼뜨리기만 하고 거두어들이지 못하면 기운은 흩어져 버리고,
가라앉히기만 하고 펼쳐내지 못하면 흐름은 굳어 정체된다.

열었으면 닫아야 하고, 들였으면 내보내야 하며, 펼쳤으면 다시 거두어들여야 한다.

선발과 숙강이란 서로 분리된 기능이라기보다, 생명이 멈추지 않고 순환을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교대해야만 하는 ‘두 개의 상호보완적 국면’을 포착해낸 개념적 모델은 아니었을까.

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움직임만으로는 생명의 리듬을 이루기 어렵다. 되돌아오고 전환하는 운동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주기가 만들어진다.

퍼져 나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걸고,
긴장했다가 부드럽게 풀리며,
자극에 반응했다가 다시 평온으로 회복된다.


第3程의 면역계가 보여주었던 지혜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침입자에 맞서 반응의 불길을 지피는 것만큼이나 때가 되었을 때 그 반응을 단호히 끄는 것이 중요했고, 맞서는 힘만큼이나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회복력이 절실했다.

이것은 비단 호흡기나 면역세포 몇 개의 특이한 성질이 아니었다.

생명은 서로 반대되는 상태 사이를 제때 오가며 자기 질서를 유지한다.

반대되는 극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본래의 축으로 돌아오는 회귀의 운동. 그 쉼 없는 왕복 속에서만 생명은 굳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쉰다.

이 사유의 끝자락에서 『소문(素問)』 「영란비전론(靈蘭秘典論)」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肺者,相傅之官,治節出焉。」
(폐는 군주를 보좌하는 재상과 같은 기관이니, 치절(治節)이 여기서 나온다.)

‘치절(治節)’이라는 말은 흔히 군주인 심장을 도와 몸 전체를 통치하고 관리한다는 관료적인 비유 속에서 읽혀왔다.

하지만 호흡과 순환, 그리고 생명이 만들어내는 율동의 마디들을 짚어온 지금, ‘마디 절(節)’이라는 글자가 유독 깊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대나무의 마디(節),
한 해의 흐름을 가르는 절기(節氣),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조절하는 절도(節度)와 절제(節制).

'절(節)'이란 끝없이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 속에 매듭을 짓고, 흐름의 방향을 바꾸며,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게 하는 ‘전환의 분기점’을 의미하는 글자가 아니던가.

어쩌면 옛사람들이 폐의 중요한 기능으로 꼽았던 ‘치절(治節)’이란,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기계적인 통제가 아니라, 쉼 없이 요동치는 생명의 흐름 속에 적절한 마디와 때를 지어주는 조율의 능력을 뜻했던 것은 아닐까.

第3程, 경계의 끝에서 발견했던 ‘때(時)’와, 호흡이 가르쳐준 ‘율동’이 ‘절’이라는 한 글자 안에서 비로소 하나로 맞물린다.

리듬이란 같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안에서 밖으로,
수축에서 이완으로,
긴장에서 회복으로,
나아감에서 물러섬으로.

몸은 마디를 지음으로써 흐름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번 역은 판교, 판교역입니다.”

안내방송과 함께 차체가 부드럽게 감속하기 시작했다.
모터 소리가 낮게 깔리며 몸이 객차 앞쪽으로 가볍게 쏠린다.

열차가 멈추고, 푸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내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플랫폼으로 발을 내디뎠다.

돌아서서 열차를 바라본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열차는 붉은 후미등을 남기며 다시 매끄럽게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열차가 멈추고 달리는 기계적인 반복 속에서 비로소 내 안의 숨결과 마디들을 보게 되었지만, 선로 위의 열차와 내 안의 생명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기차는 선로 위에 깔린 정해진 시간표에 묶여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몸은 결코 고정된 시간표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필요하면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고,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숨결을 가라앉히며,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필요에 맞추어 박자를 능수능란하게 바꾸면서도
결코 전체의 균형과 질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생명의 리듬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때를 잃지 않는 조화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한 의문 하나가 고개를 든다.

열차에 몸을 싣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숨 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심장에게 숨의 길이에 맞추어 박동을 조절하라고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친구와 헤어져 열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서둘러 내려온 뒤, 가빠진 숨을 향해 “이제 괜찮으니 원래대로 돌아가라”고 일일이 지시하지도 않았다.

면역계 역시 내가 지켜보지 않아도 스스로 침입자를 가려내고, 싸움을 멈추며, 상처를 수습한다.

열차가 떠나간 스크린도어 유리에 어슴푸레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지휘하지 않았는데, 이 몸은 어떻게 그 많은 움직임의 때를 스스로 맞추고 있는 것일까.

이 정교한 시간의 마디들을 대체 내 안의 ‘누구’가 이토록 오차 없이 주관하고 있는 것일까.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생명의 때를 헤아리며 쉼 없이 마디를 짓고 있는 이 조용한 조율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크린도어에서 몸을 돌려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플랫폼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의 마디에 맞추어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몸 안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질서가 묵묵히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나는 그 질서에 붙일 마땅한 이름을 알지 못했다.



"以醫爲鑑 窮生生之理"
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명 현상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丙午夏 溫谷作